연휴 첫날 아침은 어제와 달리 하늘이 파랬다. 이사한 집에서 눈 뜨면 보이는 게 하늘이라 행복하다고 생각한 지 한 달만에 해 뜨는 시간은 점점 빨라져 새벽부터 눈이 부셨다. 그래도 일어나 앉으면 저 멀리 계족산까지 햇빛이 미쳐서 대전의 절반을 구경할 수 있다. 내려다보니 토요일 오전에 어딜 그리 가는지 각자 다른 길로 흩어지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웠다. 며칠을 물끄러미 관망하던 풍경을 가까이서 보고 섞여야겠다는 생각에 얇은 니트와 점퍼를 걸쳤다. 좋아하는 잔디밭까지는 응달을 20분이나 걸어야 했다. 따뜻하게 입고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가을에도 이 곳에서 듣었던 노래를 들으며 공원 가장자리를 따라 빙글빙글 걷는데 여자 아이들이 양갈래 머리를 하고 분홍색 킥보드를 몰며 나와 같은 트랙을 돌았다. 조금 덥다고 생각하던 중에 나처럼 짧은 패딩을 입고 귀를 시원하게 드러낸 사람이 벤치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내가 공원을 세 바퀴 도는 동안 그는 음악도 듣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거기서 한 뼘 떨어져 있는 벤치가 빈 것을 보고 한 바퀴 더 돌았을 때도 비어 있으면 저기에 앉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떠나고 없었다.
커다란 주머니에는 손바닥만 한 읽을거리를 숨겨올 수 있다. 이마를 따끈하게 데우는 오후의 볕을 맞으며 메리 비어드의 글에 한참을 빠졌다. 딱딱한 벤치에 앉아서 고대 그리스와 미국 상원을 왔다 갔다 하던 중에 귀가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어 책에서 고개를 들었더니 이어폰에서 얼마 전 새로 알게 된 노래가 나왔다. 이 음악이 매력적인 이유는 밴드와 멜로디가 좋아서일까 한밤의 조명 아래 이 음악을 처음 들었던 순간 때문일까 생각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책이 읽기 싫어졌고 비어드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했다. 이 잔디밭에서 이어폰을 나눠 꼈으면 좋겠다.
집중력이 흐트러진 데다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해 정 붙인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오는 길에 킥보드 타는 여자아이를 다시 마주쳐 눈길을 또 주고 그렇게 평화롭게 끝날 줄 알았는데. 샴페인을 사겠다고 들른 마트에서 깔루아도 사고, 봄 옷도 사버린 탓일까 주머니에 넣었던 책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커다란 봉투를 세 개나 들고 건물을 나온 직후 알아챈 책의 부재에 서둘러 고객센터로 향했다. 유실물 중에 책은 없다고 했다. 황망한 마음에 들렀던 장소를 전부 살피며 두 바퀴를 돌았다. 잠시만요, 비켜주세요, 선생님 혹시 이 근처에서 '책' 보셨나요? 주류 코너에서 안마의자 판매점까지 돌고 나서 결국 고객센터에 전화번호를 남겼다. 계산한 물건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꾸중까지 듣고 나니 진이 빠졌다. 정신없이 쇼핑한 짐들을 잔뜩 가지고 집까지 오는 길엔 팔뚝에 힘이 들어갔다.
시금치 파스타를 만들어 먹고 산책을 다녀온 후 낮잠을 자고 흥미로운 영화를 보려 했던 연휴 첫날은 계획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공원에 책을 가져가기만 하고 읽지 않을 줄 알았는데 반이나 읽은 것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던 걸까? 저녁 내내 눈썹이 처졌다. 답장을 바라는 사람에게선 말이 없는 밤. 진심으로 돌려주고 싶은 것은 전하기가 어려워 잃은 것보다 더 많이 잃어버린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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