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밤의 해변에서 혼자
감독 : 홍상수
주연 : 김민희
본 날 : 2020. 01. 29.
평이 좋아 보러 갔던 <아가씨>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 날 인스타그램에 "민희 언니하고 싶은 거 다 해"라고 적었더니 다음날 홍상수 감독과의 스캔들이 터졌다. <아가씨>가 2016년 작이고,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2017년 작이니 김민희와 홍상수에 대한 가십거리가 잊히기 전에 이 영화가 개봉했다. 게다가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황금곰상) 후보에 올랐고 김민희는 이 작품을 통해 여우주연상(은곰상)을 탔기에 단연 화제작이라 할 수 있다.
글쎄, 지극히 정적이고 기승전결도 없는 이 작품이 어떻게 이러한 평가를 받았는지 의아한 관객도 많을 것이다. 나 또한 국제 영화제의 기준에는 완전히 문외한이고 영화에 대해 모르다시피 하기 때문에 상에 대해 이렇다하게 설명하거나 옳다 그르다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단지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보면서, 보고 난 후에 느낀 점을 그대로 적어 내려 가 보고자 한다.
한가지 선명한 것은 느리게 띄엄띄엄 주고받는 대사와 표정들 사이에 이어지는 긴장감이다. 배우들은 필요한 표정을 필요한 만큼 짓고 해야 하는 대사를 또박또박 전달한다. 1부의 대사는 지나치게 자연스러운데 분명 짜였다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들은 서로에게 기분이 어떤지 자주 묻고 또 되묻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의 감정을 명확하게 공유할 수 있다. "여기서 살고 싶어." "배고파." "괜찮아." "너는 욕망이 많잖아." 평범한 대화의 시간적 틈에서 다음 문장을 기다리는 동안 보는 이는 주인공의 감정에 충실하게 몰입할 수 있다. 편치 않은 상황이 자주 주어지는 2부의 대사는 좀 더 현실적이다. 오랜만에 마주치는 선후배의 어색한 인사. 스캔들이 있었던 배우와 대화하는 남자에게 화를 내는 연인. 술에 취해 잘 감추었던 감정이 폭발하고 그로 인해 높아지는 언성. 특별한 에피소드 없이 영희의 시간을 순서대로 보여주는 것만 같은데 다음 대사를 듣기위해 배우의 입술에 집중하게 되는 기묘한 선이 있었다.
혹자는 이 영화에 대해 '배고플 때 만들었나보다.', '술 마시고 담배만 피우다 끝난다.'라는 평을 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확실히 배가 고픈지 묻고 그에 대답하는 장면이 다른 영화에 비해 많다. 첫 번째 식사 장면에서 영희는 파스타를 먹고, "I am hungry." "I was hungry."라며 배가 고팠다고 세 번 반복하여 말하고 파스타를 더 가져와 먹는다. 영희는 그 전에 야채수프를 파는 동화 같은 식당에 찾아갔지만 휴일이라는 이유로 수프를 먹지 못했다. 유부남인 그 남자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의심하는 영희의 마음은 그가 올 때까지 채워질 수가 없다. 자식이라는 무서운 게 있는 그는 온다고 해도 영희의 허기를 채울 수 있을지 미지수다. 2부에서는 영희를 둘러싼 사람들이 영희에게 배가 고픈지 묻는다. 막걸리를 마시고, 스팸에 맥주를 마시고, 회에 소주를 마신다. 영희의 외국 생활과 스캔들을 알고 있는 이 사람들은 영희를 좋아하는지 살뜰히 챙기는 모양새다. 커피를 사주고, 방을 구해주고, 함께 불을 쬐자고 권유한다. 영희의 속사정을 완전히 알지는 못하겠지만 그의 술주정을 들어주며 그가 없을 때도 그를 걱정해준다. 밥 한 끼에 돈독해지는 게 한국인이라 그런지 밥 챙겨주는 사람들과 영희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같다. 자주 기울여대는 술잔에 보는 나까지 한 잔 부딪혀주고 싶은 몽롱함에 휘감기지만 초반부 희미했던 영희와 그 남자의 관계는 영화의 말미로 갈수록 더 솔직해진다. 결국 그 남자와의 술자리는 영희가 바라는 모습이거나, 상상하는 모습일 뿐이지만.
이 영화에 대한 다른 이의 평으로 '영화는 영화일 뿐 사실과 관련이 없다'라는 말도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현실과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분리하기 어려웠다. 정말 사실과 떨어트리려고 했다면 감독 역에 문성근을 캐스팅해 희끗희끗한 머리에 안경 쓴 모습으로, 하늘색 셔츠에 니트를 받쳐 입히진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 중 이름이라도 전혀 달랐다면 모를까, 자유분방한 걸음으로 담배를 피우는 큰 키의 김민희에게 '지수'나 '서현'도 아니고 '영희'라는 이름이 어울려서 붙인 것이라고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배우인 영희와 감독의 상황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현실과 유사하다. 유사성을 비난할 이유는 없지만 유사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는 점을 짚고 싶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김민희의 연기가 좋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영희가 담배를 피우며 저 멀리 바라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다큐멘터리와 같은 느낌을 준다. 거칠게 각본을 준비한 다큐멘터리 영화같다. 씬이 잘린 채로 휙휙 넘어가지 않고 한 사람에서 다음 사람으로, 넓은 화면에서 좁은 화면으로 중심을 옮긴다. 이처럼 한 컷이 길기 때문에 진행이 느리다는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아마추어가, 혹은 90년대에 촬영했을 것 같은 영상이다. 배우들도 마찬가지로 힘을 뺀 연기를 보여준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한석규의 연기를 볼 때 들었던, 누군가 저 사람의 생활을 몰래 촬영해 둔 것이 아닐까? 하는 감상을 김민희가 다시 주었다. 국내 상영관을 대부분 차지한 남배우들이 그러하듯이, 화가 났다고 눈을 과하게 부라리거나 몸을 바들바들 떨지도 않는다. 길가의 누군가가 다른이와 속삭이는 만큼 딱 그 정도만 연기하기에 지켜보기 편한 작품이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검색하다 보니 김민희가 주연으로 분한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가 제70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는 소식이 연예 뉴스 카테고리에서 최상단을 차지하고 있다. 기자들은 일제히 [단독]이라는 머리말을 붙이고 김민희와 홍상수 감독이 함께인 사진을 담아 기사를 쏟아낸다. 댓글은 역시 영화나 영화제보다는 둘의 관계에 훈수를 두는 중이다. 홍상수 감독이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통해 한 인간으로서 김민희의 삶이나 외로움에 대해 아무리 피력한다 한들, 김민희를 위로한다 한들, 여론이 쉽게 바뀌지는 않을 모양이다. 기사를 접하고 영화를 본 것은 아니었는데, 우연히 겹친 시기에 권해효가 영화 속에서 비난하던 대중의 모순을 실시간으로 접하는 중이다. 나는 타인에게 잔인하지 않았는가? 사랑할 자격이 있는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 영화 속 주인공들과 나의 삶, 대중의 반응이 겹겹이 쌓이며 강릉의 파도처럼 무겁게 부서진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과 대사
명수 : 애기도 낳고 그래야지 더 늦기 전에.
영희 : 제가요? 저 남자 없어요.
명수 : 음...... 뭐 그래.
영희 : 네. 남자들 다 병신 같아요.
명수 : 그래? 다 병신 같애?
영희 : 네. 다 병신 같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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