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E V I E W/B O O K S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_리베카 솔닛

셜리. 2020. 8. 17.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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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3년 전에 읽은 이후 다시 잡은 리베카 솔닛의 책.

 

순진한 냉소주의

 

p. 114 / 비전문가들도 나쁜 데이터와 더 나쁜 분석을 동원하여 미래의 불가피성, 현재의 불기능성, 과거의 실패를 확신에 차 선언한다. 나는 이런 발언의 바탕에 깔린 심리 상태를 순진한 냉소주의라고 부른다. 이런 심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 가능하다는 감각을 잃게 만들고, 어쩌면 책임감마저 잃게 만든다. 
p. 123 / 순진한 냉소주의의 대안은 무엇일까? 무엇이든 발생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 우리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 수 없을 때가 많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앞으로 벌어질 일은 보통 축복과 저주의 혼합일 테고 상당히 긴 시간에 걸쳐서 펼쳐지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역사적 기억은 이런 태도를 지지해준다. 간접적 결과, 예상치 못한 격변과 승리, 누적되는 효과, 긴 시간표를 언급하는 이야기들도 이런 태도를 지지해준다.

    챕터 내내 풀이되는 '순진한 냉소주의'는 의미나 의도가 '보기보다' 부정적으로 쓰여서 과연 제대로 번역된 것인가 계속 의문을 가졌다. 우리말에서 '순진하다'는 부정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어수룩하다' '천진무구하다' 같은 단어가 떠오르긴 하지만 나도 적절한 대안은 찾지 못했다.

  각설하고, 순진한 냉소주의에 집중한 이유는 나도 혹시 순진한 냉소주의자가 아닌가 되돌아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영역의 문제를 예민하게 관찰하긴 어렵다고 보지만, 관심을 가지는 주요 영역과 겹치는 분야에 있어서 순진한 냉소주의자와 같은 태도를 취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정당정치에 대한 견해가 그렇다. '이미 기득 정당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해서 고칠 수 있는 부분은 없어.', '여기서 군소 정당 지지자가 바꿀 수 있는 건 거의 없구나.', '내가 정당정치에 참여한들 해운대 모래사장에서 모래알 한 톨 정도의 효과나 일으킬 수 있을까?'같은 생각을 했다. 리베카 솔닛은 무엇이든 발생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라는 메세지를 전한다. 여전히 모든 일에 심혈을 기울일 에너지가 있을지 의문이 들지만 솔닛의 전언을 듣기 전과 후는 분명 다를 것이다.

 

 

분노에 직면하여

 

p.130 / 이처럼 다른 모든 것을 지우는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도널드 트럼프만큼 심한 사례가 또 있을까? 현재 미국을 이끄는 인간은 쩨쩨하고, 앙심이 깊고, 히스테릭한 인간이다. 예외적인 특권 때문에, 그는 역경과 모욕에 대처하는 지극히 기본적인 훈련조차 되어 있지 않다. 

 리베카 솔닛은 트럼프 대통령을 무척 싫어하는데 도널드 트럼프는 싫음받아 마땅한 인간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다. 오랜만에 트럼프에 대해 동일한 의견을 가진 사람을 만나 반갑다.

 

p.135 / 여성이 화를 내면, 사람들은 그것을 성격 결함으로 간주한다. 세상은 수십년 동안 페미니스트를 화난 여자로 정형화해왔고, 그럼으로써 여성의 경험에는 마땅히 화낼 만한 측면들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해왔다(사실 페미니스트 여성은 그런 측면들에 슬퍼하거나, 넌더리 내거나, 그로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공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세상은 여성의 부정적 감정은 뭐든 분노로 정의하고 모든 분노를 결함으로 정의한다).

  이 부분에서 절망감과 허탈함을 느낀 이유는, 우리나라의 경우 여성의 분노를 분노로조차 보지 않았던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2018년 말 문재인 대통령이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에 모인 여성들을 두고 그들의 '한'을 풀어줘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한'은 안타깝고 슬퍼 응어리진 마음을 뜻한다. 분노보다는 덜 이성적이고 기운이 약한 감정이다. 의지나 권력이 느껴지지 않는 단어다. 미국에서 페미니스트의 감정을 분노이자 결함으로 치부할 때 우리나라에서는 억울하게 쌓여온 원망으로 간주했다. 한국의 남성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은 페미니스트의 감정을 한 계층 이하의 피해망상으로 보는 듯 하다. 

 

p.137 / 늘 좌절을 겪는 사람은 자신의 분노를 조심스럽게 할당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실제로 누구보다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오히려 분개하지 않을 때가 많다. 오드리 로드는 <분노 사용법>이라는 글에서 유색인종 여성은 "분노가 자신을 갈가리 찢어버리지 않도록 그것들을 잘 지휘하는 법을 익혀야만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여성은 유색인종이자 여성이다. 다행히(?) 한국 사회에서야 황인종임이 차별의 근거는 아니지만,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 여성은 인종 차별과 성차별을 동시에 겪는다. 한국 사회의 여성은 (대체로) 인종을 제외하고 출신 지역이나 직급, 체형, 나이 등으로 다양한 차별을 마주한다. 리베카 솔닛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처럼 다양한 차별로 인해 분노가 우리를 잠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회복할 것인지 고민해야한다는 것이다. 최근 안희정 모친상, 박원순 미투 사건, 손정우 미국 송환 파기 등 분노할 일이 많았던 여성들에게 차분히 머리를 식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특히 앞부분 '순진한 냉소주의자'에서 주장했듯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면 더더욱 분노를 신중하게 나누어야 한다. 

 

p.143 / 많은 정치적 수사들은 분노가 없다면 강력한 참여도 없을 것처럼 말한다. 분노는 사회 변화라는 엔진을 굴러가게 해주는 휘발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끔 그 휘발유는 모든 것을 그저 폭발시키기만 한다.

  최근 한국 사회의 혐오 이슈와도 맞닿아있다. 정치적 목적으로 언론과 정치인, 각종 이익집단이 나서 혐오와 분노를 조장하는 경우를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앞서 밝혔듯 차가운 머리로 한 걸음 떨어져서 이슈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가대에게 설교하기

 

p. 151 / 그러나 많은 증거가 말해주는바, 정치 조직은 이미 자신들에게 동의하는 지지자들을 잘 동원할 때 가장 큰 소득을 거둔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의 중도파는 종종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구애하려다가 그만 자신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배신한다.

 우리나라 현실정치에서도 종종 보이는 현상이다. 극우 정당은 부적절한 소리를 남발해도 똑같이 부적절한 인간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결의를 다진다. 극우 정당의 지도부나 소속 정치인이 그러한 발언의 부적절성을 몰라서 그런다기 보다는, 온당치 못한 주장이라도 받아들여줄 지지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반면 진보 진영 정당의 경우, 이쪽도 설득하고 저쪽도 끌고 가려다 두 쪽 모두에게 버림받는 경우가 많다. 물론 당원의 수가 적고 정당의 힘이 강하지 않아 파이를 키우려다보니 선택한 전략이라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안타깝다. (하지만 이들이 안타까운 수를 택한다고 해서 극우정당을 지지해야할 필요는 없다.) 이번 2020년 총선에서 극미량의 의석을 가져간 여러 군소정당들이 꼭 리베카 솔닛의 조언을 읽어봤으면 한다.

 

p.153 / 모두가 하나에 동의하는 일은 벌어지기 어렵고, 모두가 동의하는가 아닌가는 썩 중요하지도 않거니와 그때까지 기다릴 가치도 없다. 요즘도 여자에게 남자와 같은 천부의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는 얼마든지 성평등의 원칙에 의거한 정책을 꾸릴 수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진영으로 넘어오기를 기다리기 전에, 아니 기다리지 말고, 존재하는 원칙에 준하는 정책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은 내 이마를 탁! 치게 했다. 얼마 전에 겪었던 사건과, 그 후에 내가 결심한 것을 뒷받침해주는 문단이었다. 2주 전쯤 대전 청년들이 원하는 정책을 공유하는 대전청년정책네트워크의 정책 공유회가 있었다. 나는 최근 주목받고 있는 위력에 의한 성폭력 사건을 근거로 들며 각 기관별로 노동자들이 안심하고 신고할 수 있는 감시관이나 기구가 필요하다는 안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에 반대하는 건지, 페미니스트가 앞에 나와 발표하는 것 자체가 불만인 건지, '남성이 겪는 차별은 생각해봤냐', '남녀평등 정책은 보고 하는 말이냐' 등의 공격이 쏟아졌다. 대꾸할 가치가 없는, 내가 제안한 바와 전혀 상관 없는 질문들이었지만 회의에 참석한 이상 의무적인 답변이라도 해야했고 논리적으로 그의 공격에 일일히 답했지만 그와 몇몇 인사들은 지속적으로 젠더 정책팀을 괴롭혔다. 나는 이 공유회가 안전하지 못한 공론장이라고 여겨 같은 정책을 실현할 다른 루트를 이용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리베카 솔닛이 위와 같은 진술을 이미 2017년에 작성하여 책으로 펴둔 것이다! 나는 조금 더 고무되었다.

 

 

 

스탠딩록에서 온 빛

 

p.278 / 스탠딩록의 아름다운 투쟁에서 우리가 얻은 교훈은 아주 많다. 모두가 저마다의 결론을 끌어낼 수 있겠지만, 내 결론 하나는 우리는 미래의 일을 모른다는 것, 그러므로 현재를 원칙과 직관과 역사의 교훈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탠딩록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벌어지지 않을지에 대해 단정적인 예측을 내놓았지만, 그 예측들은 결국 틀렸다. 누구도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 또다른 교훈은, 비록 승리가 달성하기 어려울 만큼 멀리 있는 듯 보이더라도 우리는 자신이 믿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나서야만 한다는 것이다. (...) 지금 우리는 민권 운동이 거둬온 승리가 위태로워 보이는 순간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더욱 그것이 승리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고, 또한 그것이 승리가 눈앞에 보이지 않던 시절 피땀과 헌신으로 일구어낸 성취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활동가의 의욕과 주체성을 고취하는 대목이다. 어떤 활동가라도 그렇겠지만, 여성운동가로서 여성이 전하는 격려의 말을 읽는 것의 감회는 다르다. 특히 자신의 경험적 사실을 근거 삼아 확신에 찬 언어로 써내려간 리베카 솔닛의 메세지는 페미니스트의 가슴에 희망을 꼭꼭 심어준다. 희망이 다시 힘으로 자라나고 또 다른 운동을 이끌어갈 줄기를 길러내어 빛을 받을 때까지 자양분이 될 것이다.

 

 

 

간접적 영향을 칭송하며

 

p.321 / 행동이 일으키는 파문은 종종 직접적인 목표를 넘어서는 지점까지 퍼져나간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원칙에 따라 살아야 할 이유가 되어주고, 설령 결과가 즉각적이거나 명백해 보이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희망에 따라 행동해야할 이유가 되어준다.
p.339 / 이 일은 오래 지속될 때에만 비로소 중요해질 것이다. 이 일이 지속되려면, 작고 점진적인 수많은 활동들이 하나하나 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결과가 직접적이거나 명백하지 않더라도 중요하다고 믿어야한다. (...)우리는 이야기나 규칙을 바꿨을 수도 있고, 미래 활동가들에게 도구나 본보기나 용기를 제공했을 수도 있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그들 각자의 노력을 지속하도록 힘이 되어주었을 수도 있다.

  리베카 솔닛은 활동가라는 단어를 자주 언급하며 생각보다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실 나는 활동가라는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누구나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시장에 가는 것도 활동,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것도 활동, 숨을 쉬는 것도 활동이다. 애매하고 번져있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니 아마도 Activist 와 Acting의 번역어로 차용하다 보니 활동가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Act하는 사람, 행동하는 자라는 의미의 활동가라면 나보다 적격인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활동가'가 한뼘 더 내 마음에 들어왔다. 

  종잡을 수 없이 하고 싶은 일을 지속적으로 해올 뿐이었던 내게 이정표같은 문장을 선물하기도 했다. 어째서 이 일을 하는지, 앞으로도 이 일을 해야하는지를 알려준 셈이다. '내가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희망에 따라 행동해야할 이유가 되어준다.' 누구보다 내가 하는 일이 중요하고 타당하다고 생각하며, 이를 통해 타인에게 영향력을 미치고자 하는 내게 기조와 같은 서술로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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