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넷플릭스가 대박쳤다. 최근 넷플릭스 이용자가 급감하고 오리지널에 대한 기대도 많이 하락하고 있었는데 요즘은 어딜가나 더 글로리 이야기다. 어제 저녁을 먹은 식당에서도, 월요일 아침 회사에서도. 송혜교와 김은숙의 만남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는데 결과적으로 잘 된 셈이다. "학교폭력에 대한 복수극"이라는 명료하고 통쾌한 주제가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더 글로리(The Glory) 시즌1
넷플릭스 8부작 드라마
포스터 속의 문동은(송혜교 분)은 처연하고 연약해보인다. "우리 같이 천천히 말라 죽어보자"라는 대사를 홍보 슬로건으로 삼았던데 그래서 문동은이 천천히 말라죽어갈까봐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정주행을 마치고나서 생각했을 때 문동은의 행동이 자기파괴적이라거나 스스로를 말려죽인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로잡혀있다는 점에서 자기 인생을 살기보다 결국 박연진(임지연 분)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어쩌랴 그것이 복수인데.
캐릭터 포스터에서 볼 수 있듯 더 글로리에는 주인공이 정말 많다. 괜히 더 글로리 연관 검색어로 더 글로리 등장인물이나 더 글로리 인물관계도가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정리하자면 문동은과 박연진, 이사라, 전재준, 최혜정, 손명오는 고등학교 동창이고, 문동은이 학교폭력 피해자 / 나머지 다섯명이 학교폭력 가해자의 역할이다. 강현남(염혜란)은 문동은의 복수를 돕는 조력자, 하도영은 박연진의 남편, 주여정은 문동은을 짝사랑하는 남자다.
1화 2화를 볼 때는 더 글로리 화면이 너무 어둡고 주인공이 많은데다 빡센 스타일링이 한 몫 하여 나도 누가 누군지 굉장히 헷갈렸다.
더 글로리 감상 포인트
드라마 초반에 문동은을 보면서 배우 송혜교가 저정도로 왜소했나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문동은의 역할을 하기 위해 감량한 것이라고 한다. 영양실조에 걸리고, 목표를 위해 웃음을 버린 문동은을 연기하기 위해 곤약밥을 주식 삼았다고 하니 역할에 얼마나 몰입했는지 알 수 있다. 냉담하면서도 친절하게 가르치는 듯한 문동은의 말투에는 초등학교 교사의 어투가 배어있어 보는 내내 진짜 준비 많이 했구나! 생각이 들었다. 옅은 화장과 단정한 옷차림도 문동은 그 자체여서 이입하기 쉬웠다.
문동은 아역 정지소 배우와 박연진 아역 신예은 배우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아역 배우들이 얼마나 성인 배우들과 닮았는지 싱크로율에 관한 이야기가 떠돌기까지 했다. 박연진 아역 진짜 무서워...진짜 학교 다닐 때 애들 괴롭히던 애같이 미안함 1도 없는 표정이 압권이어서 주인공이 느끼는 공포를 같이 느끼며 감상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염혜란 캐릭터인 강현남이나 여정 엄마 캐릭터인 병원 원장 등 재밌는 캐릭터가 많고 주연이 많음에도 다들 연기를 너무너무 자연스럽게 익살맞게 과해야할 땐 과하게 잘하는 바람에 연기 보는 맛이 있었다. 연기 구멍 없는 드라마라더니 진짜다. 예전부터 낙하산 캐스팅 발연기하는 사람 나오면 그 드라마는 절대 보지 않았는데 더 글로리는 그런 면에서 믿고 볼만하다.
또한 학교 폭력에 시달리며 극한의 고통을 느낀, 폭력 피해자가 됨으로써 가족과도 절연하게 된 동은이가 과연 어떤 방식으로 다른 다섯 명에게 복수를 해나갈지 지켜보는게 너무 재밌다. 잠깐잠깐의 위기가 있긴 하지만 철두철미한 동은이의 준비 덕에 대체로 사이다 전개로 흘러간다는 것, 학폭 가해자들이 저질렀을만한 나쁜 짓 때문에 동은이가 폭로할 비밀이 많다는 점도 시청자를 더욱 통쾌하게 만든다.
더 글로리 아쉬운 점
이틀만에 8편을 몰아보면서 빠른 전개의 줄거리를 쫓아가는데 여력을 쏟은 나지만 아쉬운 점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아쉬운 점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약자를 다루는 연출력 부족"이다.
몇 해 전 인기 드라마였던 <부부의 세계>에서는 김희애가 목이 졸리는 등 폭력을 당하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가 시청자의 반발을 산 바 있다. 폭력 상황을 표현하더라도, 맞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필요는 없다. 이건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연출 전문가라면, 프로듀서라면, 디렉터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학폭 피해자가 어떤 피해를 겪는지 보여주고 공감하게 하기 위해 "맞는", "성추행 당하는" 장면을 두드러지게 표현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뺨을 맞고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입술을 맞대는 모습을 줌인 하여 보여주는 방식으로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넷플릭스가 레거시 미디어에 비해 제재가 적은 것은 알고 있지만 이건 흥미나 오락을 위한 적나라함이 아니기에 오히려 더욱 조심했어야 했다. 피해를 겪은 이들에게는 심각한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학폭 피해자를 위한 복수극이라더니, 학폭 피해자의 피눈물나는 기억을 되살리는 격이다.
너무 촌스럽다고 생각한 부분....언제까지 여자는 구두, 백, 사치, 성매매, 허영으로 대변되는가? 무고한 피해자(문동은)과 명품, 남자에 빠져 본질을 보지 못하는 학폭 가해자(최혜정, 박연진)들. 이는 명백한 성녀/창녀의 이분법적 대립이다. 피해자도 입체적일 수 있고 가해자도 선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기상캐스터라는 여초 직업이 능력보다 나이로 계약 여부를 따지는 직업임을 꼬집으면서도 뒷담화가 심하고, 적당히 짜치지 않고, 남편감 고르기 좋은 직업이라는 식으로 편견을 강화하는 것도 더 글로리의 방만함이다. 혜정이는 모욕을 당하더라도 샤넬 드레스를 놓지 않고, 여성이 누구인지 맞추는 데는 초록색 구두와 경찰서장이 선물한 백이 매개체로 활용된다. 나는 이런 구도가 너무 지겹고,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면서 사라졌어야 할 캐릭터 구성이라고 생각한다.
더 글로리의 빠른 전개는 쓸데 없는 장면이 거의 없기 때문에 가능한데, 불필요한 장면은 대부분 여성혐오적이었다. 승무원으로 종사하는 혜정이 후배 직원에게 드레스를 대신 입어보고 사오라고 하는 부분, 문동은의 엄마가 성매매에 종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중년 남성이 이발소에서 문동은 엄마의 엉덩이를 때리는 장면 등 (애초에 가난한 집 엄마 역할들은 꼭 유사 성매매에 종사해야하는지도 의문) 여성 주인공인 강현남과 문동은의 피해자로서의 연대만 밝히기엔 다른 여성 주인공으로 인해 눈살 찌푸려지는 장면이 너무 잦았다.
김은숙 작가는 더 글로리 라는 장르물을 쓰기 앞서 딸에게 "언제적 김은숙이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는데, 더 글로리를 본 나는 여전히 김은숙이라고 생각했다. 2010년대 대학을 다닌 의대 인턴 남자가 7년 8년 바둑만 같이 둔 여자를 순애보처럼 짝사랑해서 문자를 보내고 기다린다라.....학폭, 마약, 불륜 다 개연성있고 그럴듯한데 로맨스만 오면 왜 억지로 연결하지 못해 안달난 것처럼 보이는지 모르겠다. 물론 주여정 자체도 스토리를 가진 인물이겠지만, 시즌제로 진행되는 드라마에서 시즌1만을 봤을 때 주여정이 문동은에게 빠지는 과정은 의문스러우며 불법적이다.
진료 의사도 아닌데(진료 의사도 그러면 안 된다) 학교, 주소, 전화번호를 알아내 청강이라고 쫓아와서는 빈혈약을 먹어야된다는둥 어쩐다는 둥, 스토킹 범죄가 살인으로 이어지는 한국에서 나와 같은 시청자들은 주여정에게 설렘보다 소름끼침을 느낀다. 문동은이가 시종일관 따뜻함으로 자신의 일을 멋지게 해내는 스파이 강현남에게도 열지 않는 마음을 주여정에게 열고 계속 시간을 같이 보내는게 그냥 줜나...말이 안 된다. 이런걸 우린 두글자로 캐붕이라고 한다. 차라리 하도영이랑 바람이 나면 모르겠지만(이건 스토리 붕괴) 딱봐도 난동만 살아온 스토커 주여정에게 무방비하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준다는게..의문스럽고..그렇다고 주여정이 뭐 엄청 따뜻한 행동을 해준 것도 아니고..로맨틱한 남주를 만들어주려다보니 개연성이 파괴된거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제발 다 큰 성인 여자에게 "아장아장" 걸어라 같은 말을 쓰지 말자.
본인이 그런 말을 듣고 싶다면 가까운 사람에게 그렇게 말해달라고 하면 되지, 누구보다 자립적이었던 문동은에게 "복수의 가르침"을 주는 남자 가 등장하는 것도 의아한데 날이 얼었다고 아기 취급을 하는 것은 구태의 여-남 권력 양상을 답습하는 대사밖에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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