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E V I E W/글방에서

나에게 말을 가르쳐준 여자_서한나 칼럼

셜리. 2020. 12. 28. 02:21
반응형

 

[서울 말고] 나에게 말을 가르쳐준 여자 / 서한나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76083.html#csidxecb8b3c4499a056b1c1abff5de1be84 

 

 

 

서한나 작가의 한겨레 칼럼 '나에게 말을 가르쳐준 여자'를 읽으며 떠오른 생각을 기록해두고 싶어 노트북 앞에 앉았다.

 

교수는 로봇 같고 도서관엔 책도 없는데 밤이라고 다를까.(중략) 스물셋,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친구가 말했다. 너를 알아봐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게 중요할 것 같아. 어른이 필요했지만 아무도 없던 때.

  정말 그 도서관에 책이 한 권도 없던 것은 아니다. (작가와 나는 동대학 출신이니 도서관이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알고 있다.) 인공지능 교수가 2010년대 중반부터 강의를 하진 않았다. 세상에 나이든 사람은 얼마든지 존재했다.

 

그 학교 학생들만 갈 데 없어 모인 술집이나마 기웃대다 문만 열어보고 나왔다. 어디서도 환대받지 못할 거라는 예단을 묘한 자신감 삼아 어디로도 가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드는 싸구려 가구를 갖느니 침대 없이 살겠단 마음으로. 젊음은 부담스러웠고 부담스러운 건 죄다 누추했다.

  기웃대다 나온 발걸음이 어디로도 가지 않은 선택이 그를 머무르게 했고 머무름은 그 술집에 들어가 아무말이나 지껄이며 보낸 시간보다 훨씬 가치있는 곳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체력을 비축해주었을 것이다. 부담스러운 젊음이지만 묘한 확신은 있었다.

 

오천명이면서 단 한명인 그 여자. 나의 동갑내기, 선배, 선생님, 애인. 기꺼이 삶을 알게 하는, 더 말해달라고 더 가르쳐달라고 청하게 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그 여자의 단어를 나도 모르게 배웠고 그 여자의 문형을 익혔다. 사람들이 내 다음 말을 기다릴 때 그 여자에게 배운 기막힌 표현을 떠올렸다. 사람들이 내 옆얼굴을 쳐다볼 때 나는 그 여자의 표정을 생각했다. 삶이 모두 들어 있는 얼굴도 세상에는 있다는 것과.

  하나의 얼굴형에 오천명의 표정이 떠오른다. 작가의 삶을 거쳐갔을 여자들과 내 삶에 있었던 여자들이 지나간다. 지나가는 것인지 나타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삶이 모두 들어 있는 단 하나의 얼굴과 모든 삶의 장면에 마주쳤던 얼굴들이 보이는 것 같다. 작가는 그 여자의 언어를 배워 전달했고 나는 작가의 글을 읽으며 그의 언어를 전달한다. 

 

진실을 아는 여자도, 모르려고 긴장한 여자도 머리 위에 한 짐 이고 산다. 여자들이 짐의 존재를 평생 감지하면서도 그게 얼마나 무거운지 인지하기는 어렵다는 걸 안 순간부터 내게 세상은 질문이었다. 오답이어도 좋으니 누군가 대답해달라는 몸부림이었다.

  서한나 작가의 글은 시대상을 정확히 알기 어려울 때가 있는데 '머리 위에 한 짐 이고 산다'와 같은 표현이 그렇다. 우리 세대 여자들은 머리에 보따리짐 얹고 걸어 본 적 없지만 평생을 가져갈 질문이 정수리를 묵직하게 누르니 쓰고 읽을 수 있는 문장이었을까. 읽는 이에 따라 짐을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이고진 주체가 여자임을 밝혔으니 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여자는 세상을 마주한 뒤 의아함을 느끼고 의아함과 화(和)하면서 불화하든 불화하면서 화한다. 여자 손으로 설계되지 않은 세상을 그 손으로 더듬으며 하나부터 열까지 방법을 마련하는 동안 당혹스러움으로부터 통찰을 얻는다. 내가 어디로 흘러왔고 어디로 가려는지 대충 알겠고, 모르겠다 싶은 날에도 키를 내가 잡고 있다는 감각이 생기면 삶이 버겁대도 황망하지는 않다.

  질문은 의아함에서 시작되고 대충 끼워맞추듯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살 줄 알았던 삶에 질문이 시작되면서 화와 불화의 과정이 반복된다. 벽돌로 지은 듯 단단한 틀과 벽은 왜 이렇게 생겼을까. 어디서부터 갈아내야 제대로된 길을 찾을지 몰라 머리를 싸매고 헤매더라도 틀린 곳이 어딘지는 알기 때문에 황망하지 않다. 그러니 우리는 키를 잡아야 한다.

 

넌 꼭 선생님 같아, 내가 말하면 그 여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알아듣잖아, 네가. 몸으로 앓다가 퍼뜩 얻은 말들을 방비 없이 내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 때 내가 느낀 애절에 가까운 환희. 말마다 명중해 몸 비틀며 웃게 하는 솜씨. 이 세상에는 네가 있고 네 말을 알아듣는 내가 있고 말하는 입을 인내심 좋은 제자처럼 지켜보는 서로가 있다는 안도감.

 첫줄은 도치로 살린 리듬감이 좋고, 대화로 표현해 좋고, 말이 통하는 여자들이라면 늘상 하는 말이라 좋다. 특정하게 어려운 말을 쓰는 여자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어떤 여자들이라도 하는 말. "애절에 가까운 환희" "말마다 명중해 몸 비틀며 웃게 하는 솜씨"는 서한나 작가의 환희와 웃음을 그리게 한다. 자신이 몸으로 겪은 장면을 제3자가 본 듯 묘사하는 능력이 출중하다. 내가 서한나 작가를 보고 쓴 말인가? 싶게 한다. 서한나 작가만이 쓸 수 있는 글이면서 나에게 명중하는 말이다. 그런 대화의 명중은 서로에게 안도감을 쏘아준다.

 

너는 알아듣겠지, 그런 믿음에서 한 여자의 말이 시작된다. 어느 날 그에게 확신이 필요할 때 내가 살아온 방식으로 확신을 주겠다고 마음먹는다. 당신이 번쩍 눈을 떠 신통한 이야기를 마구 쏟아낼 때 그것을 단박에 알아듣겠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못 알아듣겠지 생각하면서도 지금 아니면 언제라도 알아듣겠지 하는 믿음에서 시작되는 여자의 말. 다음에 올 사람이 할 말을 신통할 것이라 예견하며 확신을 주겠다하는 작가는 스물두살의 작가에게 없었던 '어른'이 된 것 같다. 작가가 그의 말을 단박에 알아들어 준다면 울퉁불퉁 여자와 다른 모양으로 형성된 세상에 마주앉은 둘 사이에 믿음의 시선이 오갈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사람이 작가 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며 그 시선이 단 하나가 아닐 것이라는 확신 또한 주고 있다. 번쩍 뜬 눈이 몇 쌍이고 마주치고 또 마주치며 대화를 이어나갈 것이다.

 

  프로파간다적이면서 그렇지 않은 척, 한 명이면서 오천명을 생각나게 하는, 다정하면서 믿음직스러운 글이다. 손을 맞잡을까 말까, 맞잡은 손바닥은 어떤 열기가 있을까, 손가락 깍지를 껴볼까. 서한나의 칼럼 읽고 손을 맞잡는 이들이 늘었으면 좋겠다.

반응형

'R E V I E W > 글방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유지의 희극  (0) 2021.04.13
장래희망을 그려보세요.  (0) 2021.02.09
Be my scent  (0) 2020.12.23
나에 대해 예상하셨다면서요  (0) 2020.12.12
한강을 가지고 싶으세요?  (2) 2020.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