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두 번째(색연필)
장래희망을 그려보세요.
대학교 과방에서 시시껄렁한 잡소리를 하며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한 선배가 복사한 종이를 한 뭉치 들고 들어오더니 설문조사를 하란다. 과목 이름이 '선거와 조사'였나 아무튼 난 듣지 않는 전공 수업이었는데 과제로 조사 방법을 정하고 문항을 구성해서 실제로 사람들한테 설문을 받아와야 한단다. 시간도 많고 거절할 깜냥도 안되는 2학년 여자애들은 합판으로 만든 테이블 위에 엎드려서 열심히 답안에 체크를 했다. 근데 문항이 이런 거였다. 졸업 후 몇 년 안에 취업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십니까? 취업한 이후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연봉은 얼마입니까? 실제로 희망하는 연봉은 얼마입니까?
갤럽이나 한국리서치에서 하는 설문조사만 해보다 선배가 만든 문항을 보니까 되게 구리고 문항 구성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가 보다 딴생각을 했다. 답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손 가는 데로 표시를 했는데 그걸 아무렇지 않게 쳐다보고 있던 스물여섯 살 남선배가 말했다. "너네 되게 꿈이 작네?“
거기 있는 애들 중에 꿈이 작다고 함부로 평가받을 애는 없었는데. 그런데 나를 포함한 친구들은 하나같이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연봉을 "2,400만 원"으로 선택하고 있었다. 나중에 그 남선배는 기름집이라 불리는 석유회사에 취직해서 4,000만 원을 초봉으로 받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거기 쭈그려 앉아서 설문조사에 임했던 10년 전의 여자애들은 지금만큼 세상 물정을 알았을 리도 없는데 현실 감각은 기가 막혔다. 우린 지금 진짜 월급 200만 원을 받으며 회사를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초봉은 2,400도 되지 않았다. 4천만 원을 받은 남선배보다 우리가 미래를 내다보는 데 더 뛰어났던 거다.
꿈이 많고 자주 바뀌는 초등학생이었을 때 장래 희망을 그려 내라고 하면 가수나 국회의원이나 디자이너를 그렸다. 꼼꼼히 색칠하고 배경을 화려하게 꾸며서 반 뒤에 있던 초록색 게시판 가운데 붙이려고 눈치 싸움을 했다. 지금은 그 그림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하겠지. 같은 일을 해도 남몰래 나만 연봉을 작게 주는 사장이 있단다. 사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널 뽑고 싶어 하지 않기도 한단다. 그래서 내 친구들은 전부 이름을 쓰지 않는 시험을 치고서야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됐단다.
다행히 장래희망과 꿈이 같지 않다는 걸 진작에 알게 됐다. 하지만 기름집 선배처럼 마음 편하게 높은 연봉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게 됐다. 그 고의적인 간격을 좁히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균일한 바닥에서 시작하지 못했기에 더 많은 공부를 하고 비용을 들이고 밤을 새워 토대를 올린다. 이유 없이 날 뽑지 않던 나에게 연봉을 달리 주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함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지금, 설문조사에서 다른 답변을 선택하는 미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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