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방글방 첫 번째 모임(4/9)
두 가지 다른 글감
나는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을 기록한다. 순간의 감정, 스쳐 지나가는 아이디어, 평범하고 소박하지만 그래서 더 잊혀지기 쉬운 하루를 보내면 글을 쓰고 싶다. 어렸을 때부터 기억력이 좋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 날 수진이는 보라색 스웨터를 입었잖아. 엄마는 쌀국수를 먹으러 가자고 했구요. 그러면 사람들은 뭐 그런 걸 다 기억하니, 혹은 어떻게 그것까지 기억하니라는 말을 했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해야할 날이 늘어나고 충격적인 사건이 무난한 일을 잊게 하면서 내게도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군데군데 비어있는 연결고리를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찾아줄 때면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거의 기억에 대한 집착과 같은 이 감정이 나를 쓰기로 이끌었다. 연기처럼 사라져간 장면을 붙잡기 위해 선명한 모니터 속 활자로 일기와 메모를 남겼다. 4년이 지난 글도, 10년이 지난 글도 지금의 나를 그 날의 나에게로 데려다 준다. 포근한 침대에 누워 블라인드 사이로 봤던 달빛에 눈이 부시고, 라디에이터 타는 냄새를 맡는다. 깨질 듯 아팠던 머리가 진통제 덕분에 말끔하게 나았다는 글을 읽으면 아프지 않았던 머리도 시원해진다. 잠깐의 게으름을 밀쳐내고 적어둔 글이 끊어졌던 사슬을 또렷하게 이어준다. 별 볼 일 없는 날이어서 그냥 멀리 떠내려갈 것 같은 날, 나는 쓰고 싶어진다.
이보다 강한 에너지로 펜을 잡게 하는 때가 있다. 흥분이 심장을 펌핑해 손끝까지 열기를 뻗치고 내 안으로 내지른 소리가 가슴을 뚫고 나올 때는 글을 써야한다. 특히 어떤 종류의 불의는 열의에 기름을 붓는다. 어지러운 세상사에 마음이 혼란해질 때면오히려 냉정하게 오탈자를 검사하고 비문이 있는지 찾아가며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다. 수 백만 명이 관람했다는 블록버스터 영화가 여성을 활용한 방식은 B급이었다. 유일한 남자 직원을 총애하는 남자 과장으로부터 직장 내 남성 카르텔이 시작된다. 같은 식으로 시작되는 단락을 쓴다. 내게는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하는 기질이 있어서 드러내고 표현하기를 참기 힘들다. 하루 백여 명이 들리는 블로그나 익명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지면으로 쓴다. 수필을 가장한 논설문을 띄운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공감하거나 감화되거나 반대를 해도 좋다. 자극을 주고 금방 사라질 작은 물결이라도 일으킨다면 그만이다. 돌이켜보면 학창시절 내내 백일장, 글짓기, 논술과 떨어져 살지 않았기에 글로써 기질을 발현하려는 것은 삶을 따라 이어져 온 필연이 아닌가 한다. 앞을 내다보아도 그 길은 여전히 곧게 뻗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젠가는 내 분야의 칼럼니스트가 되어 있기를 바라며 짧고 긴 사설을 계속해서 써내려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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