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스의 야경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정면으로는 하늘과 경계를 찾기 힘든 검은 바다가 부드럽게 육지 쪽으로 파도를 밀어 보냈고, 앉은자리 양쪽으로는 둥근 언덕이 수평선을 향해 천천히 낮아지며 촘촘히 박힌 불빛으로 은은하게 빛났다. 10시가 넘은 시각이었지만 해안은 한낮인 듯 북적였다. 지중해의 여름 바람과 경치에 취한 이들이 큰 소리로 웃으며 발을 굴렀다. 싸구려 와인을 들고 바닷가로 나온 두 사람만이 다른 여행객들의 침묵을 대신하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나는 3유로짜리 와인의 뚜껑을 가볍게 돌려 땄다. 친구는 호스텔 부엌에서 훔쳐 온 플라스틱 와인 잔을 무심하게 내밀었다. 푸쉬식- 탄산 소리와 함께 투명한 액체가 반쯤 잔에 담겼다.
“몽마르뜨 언덕에 있던 술집 지하 화장실 냄새가 나.”
와인을 한 입 맛본 친구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바닥에 잔을 비워버렸다. 알코올 냄새가 시큼하게 올라오는 와인은 그렇지 않아도 무겁던 공기를 바닥으로 가라앉혔다. 더욱 할 말이 없어졌고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묵묵히 한 잔, 두 잔 술을 따라 마셨다. 친구는 바닥에 깔린 조약돌을 손바닥으로 굴리며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귓가에는 불어, 독일어, 영어가 한데 뒤섞여 흘러들어왔다.
“새벽 기차를 타는 게 아니었어.”
친구는 무릎을 닦은 휴지 뭉치를 비닐봉지로 던지더니 좌석 사이에 쑤셔 박았다. 하얀 피부가 넓게 까져 핏방울이 맺혔다. 보는 내 눈이 따끔거렸다. 우리가 예약한 기차는 다섯 시 이십 분에 파리에서 니스로 출발. 나는 다섯 시에 눈을 떴다. 시계를 보자마자 친구를 흔들어 깨웠고 얼굴에 간신히 물만 묻힌 채로 역을 향해 달렸다. 다행히 시간 안에 도착했는데, 열차를 타기 직전 친구는 자신이 끌던 캐리어에 걸려 넘어졌다. 그런데 새벽 기차 탓을 한다. 나는 말 없이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세 시간 남짓 수면을 취한 피부가 꺼끌꺼끌했다.
“낮 시간으로 잡았으면 좋았잖아.”
원망이 가득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보탠다.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 좌석에 붙은 그물 모양 주머니만 바라보았다.
“돈 몇 푼 아끼겠다고 이래야겠냐?”
이번에는 나도 미간을 좁혔다. 오후에 출발하는 기차의 반값이라며, 신이 나서 손뼉을 치며 티켓을 끊었던 게 3주 전이다. 나는 잠시 친구를 바라보다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테제베는 조용하게 노랗고 푸른 평야를 달렸다. 뻑뻑한 눈동자에 들어오는 밋밋한 풍경이 지루했다. 아침 먹을거리도 사 오지 못해 허기가 졌지만, 날 선 시간이 불편해 아무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아버렸다.
그렇게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술을 따르는데 어느새 마지막 방울이 잔에 떨어지며 작은 물결을 일으켰다. 해안가를 따라 늘어선 가로등 불빛도 일렁였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하고 일어서는데 몸이 휘청하고 흔들려 땅을 짚었다. 야, 야, 같이 가. 친구는 뒤에서 슬며시 내 팔뚝을 잡았다. 그런데 누군가 다른 쪽 팔뚝을 잡았다.
"Ohio, lady! You need someone to stay with tonight?“
나는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머리를 짧게 깎은 키 큰 남자가 내 팔을 잡고 있었다. 무어라 대꾸하기는커녕 붙잡힌 오른쪽 팔을 빼내야 하는데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야 이 새끼! We are not the Japanese!“
친구가 나를 홱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기며 소리를 질렀다. 격한 반응에 당황한 쪽은 남자였다. 그는 의외로 순순히 Okay라고 답하며 뒤돌아갔다.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그를 비웃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괜찮아? 왜 바보같이 그냥 서 있어!“
푸하하. 나는 그냥 웃음이 났다. 비실비실 웃는 얼굴로 친구의 손을 잡고 사람들이 줄을 선 공중화장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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