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래도 할아버지 얼굴 봤던게 더 좋아."
"나도. 전쟁에서 살아돌아오신게 어디야. 그러니까 할머니한테 잘해드려. 애교도 많이 부리고."
"웅."
남동생과 이야기를 하며 주름이 많았던 할아버지 얼굴을 생각한다. 어렸을 때 내가 살던 구미의 한 동네에는 할아버지들이 별로 없었다. 나이든 할아버지들을 볼 수 있는건 주머니속에 꼭꼭 접어 다니던 종이돈 속에서나였다. 우리 할아버지는 세 명의 할아버지들 중 1000원 지폐의 퇴계 이황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5천원짜리의 율곡 이이는 너무 젊은데다 기왓장같은 모자를 쓰고 있었고, 세종대왕은 얼굴이 둥글둥글 살찌고 눈두덩이가 두텁다. 긴 코에 갸름한 얼굴, 불거져나온 광대뼈와 움푹 패인 눈두덩이가 지금 봐도 나의 할아버지와 닮은 듯 하다. 15년 전에 세상을 떠난 분이시건만, 생전의 잦은 왕래와 친밀함 덕에 여전히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얼굴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은 날씨가 좋지 않았다. 한여름 주말이어서 우리 가족 넷과 엄마 뱃속의 아기는 집 근처 사찰로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자가용으로 3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소풍을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엄마가 불룩 나온 배를 움켜잡았다. 단순한 복통이어도 차를 돌려야했겠지만, 아기가 살고 있는 중이어서 상황은 더 급했다. 아빠는 가까운 대형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엄마는 각종 검사를 받아야 했다. 나와 내 동생은 아무것도 몰라서 걱정만 하다가 또 지루해하다가 두세시간을 기다렸다. 절 구경을 가던 엄마가 수술을 받아야한다는 통보를 듣고나서 우리는 집으로 옮겨졌다. 삼성 차병원에서 남율리 우리집으로 가던 길의 적막한 차 안. 그리고 흐리던 바깥 하늘이 2004년의 색감으로 사진처럼 그려진다. 그런데 마치 뻔한 클리셰처럼 악재는 겹치기 마련이라 적막을 깨고 아빠의 남색 폴더폰으로 전화가 울려왔다. 아빠의 목소리도 기억난다. "연화야, 할아버지 돌아가셨단다."
아내가 수술로 입원해야해서 초등학생인 두 아이를 집으로 데려다주러 가는 길에 들은 비보. 아빠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주변 사람들에게 부고를 알렸고 나에게는 장례식장에서 입을 옷가지를 챙기라고 했다. 열세 살의 나는 누구의 장례식장에도 가본 적이 없어서 어떤 옷을 챙겨야하고 어떤 물건을 가져가야하는지 전혀 몰랐다. 대충 검은색 옷가지를 입어야하는데 검은색 옷이 없어서 어떡하지. 흰색 검은색 체크무늬 리본이 그려진 핫핑크색 티셔츠를 골랐다. 어두운 초록색 카라티도 가방에 넣었고 검은색 흰색 잔줄무늬가 있는 반팔옷을 입었다. 대충 그거면 된다고, 칫솔과 머리끈을 챙겨 다시 차를 타러 주차장으로 나갔다. 구미에서 거제도를 가는 길은 멀다. 우리는 저녁을 달려 거제 백병원에 도착했다. 이미 도착한 사촌과 고모, 할머니가 계셨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맞는 것이 처음이어서 어떤 감정을 가져야하는지, 어떻게 보내드려야하는지도 몰랐다. 내가 할아버지의 영정앞에서 어떤 말을 해야할지 고르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할아버지에게 절을 하고 갔다. 내가 모르는 친인척과 엄마 아빠의 동료들까지 많은 조문객이 장례식장을 들렀다. 부산에 사는 오촌 아저씨, 육촌 언니들도 왔다. 안동에 사는 이모부들은 어찌나 빠르게 운전을 했는지 가까운 곳에 사는 손님들보다 더 빨리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아빠를 위로했다. 한쪽 구석에서는 장지를 논의 했고, 한쪽 구석에서는 눈물만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 수 많던 얼굴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할아버지의 누나, 그러니까 고모할머니의 얼굴이다.
할아버지는 위로 형이 세 명, 그리고 누나가 한 명 있었다. 말하자면 막내인 셈이고, 아들부잣집이었다. 큰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는 설이면 설, 추석이면 추석마다 뵈었지만 우리 할아버지와 닮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퇴계 이황처럼 선이 가늘어보이는 한편 큰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는 연세가 더 많으심에도 살집이 있고 몸집이 단단해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런데 고모할머니는 달랐다. 약간 튀어나온 광대뼈와 턱이 얄쌍한 얼굴형, 눈과 눈썹이 먼 것까지 할아버지와 너무도 닮은 얼굴이었다. 자주 뵙지 못했던, 그 할아버지를 닮은 얼굴이 할아버지의 사진 앞에서 누구보다 많은 눈물과 울음소리를 쏟아냈다. 어쩔줄 모르고 상주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는 같이 무너져 앉아 말랐던 눈물을 다시 흘릴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내 발바닥을 긁으며 장난을 치던 움직이는 모습보다 사진 속 근엄하게 멈춘 할아버지의 형상이 익숙하게 떠오르지만 가끔 이렇게 떠올릴 수 있는 할아버지가 계셨던 것만으로도 좋다. 할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한 남동생도 나와 같은 뜻으로 한 말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계셨더라면 할아버지는 90살이 넘으셨을 것이고, 우리는 이렇게 생각날 때마다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했겠지만. 그렇지만 흔한 지폐에서 비슷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할아버지가 있었으므로, 어쨌든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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