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E V I E W/글방에서

우산을 쓰고 계곡에 앉아있던 친구의 이마

셜리. 2019. 10. 27.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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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이 없이 거친 수풀이 우거져있던 곳도 헤치고 갈 에너지가 있었다. 그때는. 월요일 2교시에서 3교시로 넘어가던 쉬는 시간, 아파트 옆 동에 사는 친구가 내 책상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 지난 주말 멋진 곳을 발견했다는 비밀을 풀어놓았다. 점심시간이 되어 친한 친구 다섯이 모두 모이자 머리통을 맞대고 그곳에 갈 계획을 세웠다. 돗자리랑, 수건이랑, 갈아입을 옷을 챙기자. 토요일 오후 두 시에 산으로 들어가는 길목 앞에서 스포츠 샌들을 신은 다섯 중학생이 만났다. 비가 오래 오지 않은 탓에 잔디가 밟혀 하얗게 드러난 산길은 먼지가 뿌옇게 날렸다. 누가 사는 건지 안 사는 건지 모를 외딴집을 빙빙 돌고 무너져내린 돌담 앞까지 갔지만 졸졸 들릴법한 물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여기 맞는 거야?"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네 명의 짜증에 자신만만했던 아파트 옆 동 사는 친구의 얼굴은 점점 주눅이 들어 움츠러들었다. 네명은 눈썹으로 내려앉는 더위를 손등으로 가리며 짝다리를 짚고 멈춰 섰다. 그때 옆 동 사는 친구가 돌담 위를 가린 덩굴을 활짝 펼치며 소리쳤다. "여기야! 여기!“

  과연 키가 큰 나무 위에서 발처럼 흘러내린 넝쿨을 걷어치우자 아무도 오지 않았지만 누군가 만들어 놓은 듯한 폭이 좁은 길이 나타났고, 우리는 돌담을 뛰어넘어 그 길을 따라 걸었다. 우리가 당도한 계곡은 친구가 비밀스럽게 자랑할만한 장관이었다. 가로폭은 열다섯 발자국이 되지 않는 정도였고 커다란 세 층계의 계단 형식으로 물이 흐르고 있었다. 계곡의 깊이가 적당하고 물도 부드럽게 흐르는 식으로 중학생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우리는 한쪽에 대충 돗자리를 펴고 풍덩 허리까지 오는 물속으로 겁 없이 뛰어들었다. 서로에게 퍼부은 물장구로 머리카락이 머리통에 달라붙고 엄마가 챙겨 발라준 선크림이 뚝뚝 떨어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몰래 오줌 누지마라! 마려우면 밖에 나가서 싸고 온나! 오줌을 왜 싸는데! 소리를 질러도 우리끼리만 들을 수 있었다.

와중에 성격이 차분했던 한 친구는 물이 얕고 돌바위가 평평하게 깔린 곳에서 우산을 양산삼아 쓰고 앉아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왠지 그 모습이 어른스럽고 멋져 보였던 나도 조용히 깊은 물에서 나와 두 번째 층계로 걸어 올라갔다. 돗자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차분한 친구를 바라봤더니 평소에 내리고 있던 앞머리를 시원하게 올려 사과머리로 묶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마가 너무나 반듯이 깨끗했던 것이다. 당시 나의 이마는 청춘의 다이아몬드가 다닥다닥 박혀 매일 거울을 보고 짜내고 곪은 상처를 닦아내느라 괴로움이 심했는데, 그처럼 부드럽게 닦인 듯한 이맛전을 보니 부러움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퐁퐁 솟아올랐다. 언젠간 저렇게 솜털만 남은 이마를 가질 수 있을까. 그때의 고민은 이런 것이었고 감정은 이런 것이었다.

  유년시절의 다이아몬드는 자잘한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고 이제는 다른 다이아몬드를 갈망한다. 그때의 감정과 감회는 그 날의 물길처럼 한 단계 한 층계를 따라 저 멀리 떠나가고 나도 새로운 사람들과 계곡을 찾는다. 돗자리와 수건뿐 아니라 복숭아에, 와인잔에, 담요, 꼬마김밥, 연필과 읽을 글을 껴안고 좀 더 복잡하고 샘이 깊은 고민을 이야기한다. 다만 학창시절과 마찬가지인 것은 학교와 직장으로부터 따로 떨어진 울창한 나무 지붕 아래서 우리의 고민이 계곡의 울퉁불퉁한 내리막을 따라 씻겨져 내려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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