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E V I E W/글방에서

40년 후 나의 하루

셜리. 2019. 8. 29.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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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는 여름이 가고

 

'Wake up everyone. How can you sleep at a time like this’

스피커에서 울리는 알람을 껐다. 730. 조금 더 자고 싶지만, 수요일엔 요가를 가야 한다. 잠시 멍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상체를 바로 세우고 베개에 기대앉았더니 웰리가 방 한쪽 구석에서 날 쳐다보고 있다.

"굿모닝, 웰리?"

앉아있던 웰리가 반가운 웃음을 지으며 혀를 빼고 뒷다리를 들어 일어선다. 배가 고픈가보구만.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가자, 웰리야. 1층으로 내려가 찬장을 열었다. 사료를 밥그릇에 덜어줬더니 와작와작 맛있게 먹기 시작한다. 식탁 의자에 가만히 앉아 웰리를 내려다보다가 나도 시리얼과 우유를 꺼내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날씨가 좋으니 주방 뒤쪽 문을 열어 웰리를 마당으로 내보내 주었다. 웰리는 풀밭으로 달려나가더니 땅을 헤집고 흙냄새를 맡으며 뛰어다녔다. 해가 쨍쨍히 내리쬐는 마당과 펄쩍거리는 웰리를 보다가 기지개를 한 번 켜고, 요가수업에 가기 위한 짐을 챙겼다.

요가는 일주일에 세 번 주민센터에서 이루어진다. 겨울에는 차를 타고 가지만 요즘 같을 때는 날씨가 좋아서 간단히 가디건만 걸치고 20분을 걸어간다. 캐나다의 짧은 여름은 한껏 즐겨줘야 하기때문에 햇빛이 통과하는 초록색 나뭇잎들과 아무렇게나 자란 수풀도 천천히 바라보며 걷는다. 운동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정기적으로 요가를 다녔을 때 내 정신과 건강이 훨씬 나음을 느낀다. 그곳에서 만난 동네 주민들과 친구가 되는 것도 좋다. 오늘 저녁도 같은 클래스에서 만난 앨리스와 함께 보내기로 했다.

수업이 끝나고 나니 배가 한참 고파졌다. 이 지역에서 가장 좋아하는 카페인 스테파니에 가서 가지 파스타를 시켰다. 토마토소스를 버무린 스파게티에 손바닥만한 가지를 전처럼 구워 얹어준다. 나이는 먹었지만 먹는 양은 전혀 줄지 않아서, 이전처럼 한 그릇을 쓱싹 비웠다. 만족스러운 식사와 기분 좋은 서비스에 3달러의 팁을 얹어두고 밖으로 나왔다. 곧 라디오 방송에 가야 할 시간이다.

미리 받아둔 질문지를 한 번 더 읽고, 차를 끌고 다운타운으로 갔다. 오랜만에 오는 방송국. 젊은 사람들이 사원증을 목에 걸고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어릴 땐 라디오 DJ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게스트라도 할 수 있는 게 어디야 생각하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최근에 한국에서 있었던 페미니즘 시위에 대해 의견을 말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진행자에게 생각을 그대로 전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제가 이 나이가 되어서도 이런 문제에 대해 걱정하고 고민해야 할 줄 몰랐어요. 분명 40년 전보다는 나은 세상이 되었지만, 아직도 여성 인권은 남성 인권의 수준에 한참 못 미치거든요. 저는 한국의 뜨거운 날씨를 견디며 시위에 나온 젊은이들을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정부와 기득권인 남성들은 그들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해요." 진행자는 나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여성 인권에 관한 책을 쓰실 건가요?" "오 그럼요. 페미니즘의 세계는 넓고 무궁무진해서 아직도 다 모르는 것 같아요. 연대와 발전을 위해서 기여할 수 있는 한 쓰고 또 쓸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와 찐 흰살생선과 샐러드로 저녁을 먹었다. 8시까지 앨리스를 만나러 가야 했기에, 서둘러 제일 좋아하는 진주색 수트를 입었다. 오랜만에 조금 화려한 귀걸이도 하고 앨리스를 태우러 갔다. 그는 오렌지색 꽃무늬가 화려한 쉬폰 드레스를 한 손으로 잡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오늘 멋지네." "당신도." 앨리스는 활짝 웃었다. 공연장으로 가는 내내 시애틀에 사는 그의 딸에 대해 들었다. 딸의 아들이 막 3살이 되었는데, 오동통한 볼살을 마구 주물러주고 싶다며 올겨울엔 그 아이를 보러 가야겠다고 한다.

"그래서 말인데 앤, 나랑 같이 시애틀로 여행 가지 않을래? 웰리도 같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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