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커피
아이스커피의 맛이 가장 생생하게 기억나는 게 언제인지 떠올려 보세요. 더위가 덜 식은 추석 연휴는 아니었나요? 꽉 막힌 고속도로, 다섯 가족이 좁은 세단에 서로를 버티고 앉아 짜증을 부리다가 간신히 휴게소에 들어갔어요. 큰 언니가 추석 보너스를 받았다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쏜대요. "여기서 나가는 길목이 한참 걸릴테니까 얼른 차로 돌아가!"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가볍게 뛰어 차로 가요. 엄마 꺼 한 잔, 내 꺼 한 잔 양손에 들고. 휴게소에서는 아메리카노가 6,000원이나 해요. 그 날 언니는 3만 원으로 차 안의 공기를 환기시켰어요. 혹은 연인과 떠난 바닷가에서 마신 커피의 달콤함이 생각날 수도 있어요. 얼음이 금방 녹아서 약간은 밍밍하지만 청량한 해변과 그 위로 흩뿌리는 햇볕을 보니 싱겁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차가운 잔에 붙은 공기가 물방울이 되어 떨어지고, 나를 바라보는 그대 눈빛에 꿀방울이 떨어지고. 쪼로롭 마지막 한 모금을 들이마시고 나면 쪽 하고 입술이 와서 내 볼에 붙어요. 이것도 아니면 스무 살 때 처음 마신 아메리카노인가요? 고등학생 때까지 카페에 올 일이 거의 없어서, 주문할 때부터 조금 난감한 기분을 느끼다가, 울리는 진동벨에 받아온 치즈케익과 아메리카노. 첫 한입은 너무 써서 "어른들은 이걸 왜 마시는 거지?"라고 볼멘소리를 했는데 치즈케익을 포크로 떠서 입에 넣은 후 다시 마신 아메리카노의 맛에 "우와, 이 맛에 마시나 봐!"라는 말이 절로 나왔을 것 같은데요. 당신은 어떤 장면이 떠오르나요.
당신의 기억을 헤집기 위해 조금 더 상세한 경험을 말씀드릴게요. 스물두 살 7월이었어요. 싸구려 호스텔의 에어컨에선 시원한 바람 대신 하얀 김만 나와서 열대야에 밤을 설친 다음 날이었거든요. 아침으로 7파운드짜리 '잉글리쉬 블랙퍼스트'를 사먹었는데, 구운 베이컨에 삶은 콩, 토스트 두 조각에 가염버터, 후추를 잔뜩 뿌린 계란 프라이까지 모든 게 짰어요. 입술의 소금기를 닦으면서, 친구와 이틀 뒤에 만날 것을 기약하고 지하철역으로 달렸어요. 플랫폼에 도착했을 때는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어있었어요. 런던 지하철에는 아직도 냉방시설이 없답니다. 그말인 즉슨 6년 전에도 에어컨이 없었다는 말이죠. 주말 한낮의 여유를 이용해 이곳저곳 이동하려는 인파와 급하게 기차역으로 가야 하는 제가 한데 뒤섞여 서로의 불쾌지수를 높였어요. 시간을 맞출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결국 2분 늦어버리고 말았어요.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으로 역무원을 붙잡고 여차저차 설명하니 제 티켓으로 다음 열차를 타도 된대요. 허레이!
맨체스터까지 두 시간 반을 달리는 급행열차가 금세 들어왔어요. 자리를 찾아 앉고, 건물들이 띄엄띄엄 간격을 넓혀가자 제 정신도 스러지듯 멀어져 갔어요. 한잠 자고 일어났더니 얼굴이 번들번들해요.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맨체스터 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4시가 넘었었거든요. 다섯 시까지 오픈한다는 국립축구박물관에 가기 위해서 부지런히 걸었어요. 이 낯선 도시의 빈티지한 정취를 즐기지도 못했는데, 초행길이라 그런지 인간 네비게이션도 30분이 넘게 걸려 도착했어요. 막상 도착하고 보니 프레타망제의 반쪽자리 샌드위치처럼 삼각형 모양으로 생긴데다 3면을 은빛 유리로 덮은 국립축구박물관은 학생용 견학 장소 같았어요. 터치스크린으로 골 넣기 게임, 수화기를 들어 선수들의 목소리 들어보기 등등 알록달록한 곳이었죠. 당시 축구에 푹 빠져있던 저는 허탈함을 느끼며 4시 50분쯤 박물관을 빠져나왔어요. 남부인 런던보다는 선선했지만, 여전히 해가 긴 영국이어서 아직 쨍쨍했어요. 유심칩도, 데이터 로밍도 하지 않았기에 맛집을 찾을 새도 없이 눈앞에 보이는 건너편 노천카페로 들어갔어요. 북부는 춥다는 말에 가져온 청자켓을 황망히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어요. '잉글리쉬 블랙퍼스트'를 먹고 나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걸 막 깨달았지만 배는 고프지 않았어요. 우유곽 한 통을 가득 채울 만큼 흘렸을 땀과 간간했던 식사 때문에 허기보다 목마름이 입을 마르게 했거든요. 씁쓰름하고 신맛이 강해 제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20분 만에 프라페 잔에 담긴 커피를 다 마셔버렸어요. 평소 세 시간 동안 반 잔을 홀짝인다는 점을 고려하면 원샷을 한 거나 다름없어요.
몇 주간 블로그로 탐방했던 목적지는 허무했어도 열기와 끈적임에 맞서 싸운 육신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보상을 받고 기운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2박 3일간 북부를 여행하겠다고 챙겨온 짐은 겨우 크로스백 하나. 그 안에 유럽여행용 일기장이 들어있었어요. 포토샵으로 만든 표지와 날짜, 경로, 일기를 쓸 수 있도록 만든 양식을 21장 엮어 만든 저만의 노트였어요. 스물두 살의 감성이 느껴지죠? 동양인이 하나도 없던 카페에서 살짝 구겨진 A4용지 일기장에 오늘 있었던 일을 후루룩 적어 내려갔어요. 그때까지의 일을 거진 다 썼을 때, 갑자기 연필을 내려두고 카페 안을 휘 둘러보았어요.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런던까지 함께 온 친구도, 작년에 유럽여행을 갔다 온 친구 중에도 여행하며 기록을 남기겠다고 이렇게 애를 쓴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나는 왜 남들보다 적는 것에 집착하고 있을까? 팔다리가 다 드러나는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휘적휘적 돌아다니느라 이만큼 지친 와중에 여기서 꼭 무언가 남겨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앞 테이블에 앉은 세 사람이 말을 멈추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잊고 있었던 오래된 사실이 되살아났어요. 인생의 목표로 강요받던 수능을 치르고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흥청망청 나를 사색하지 않고 사느라 깜빡했던 거죠. 정말이지 스무 살 이후에 글에 대해 생각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어요. 아주 어릴 때부터 학창시절 내내 연필을 놓지 않아 굳은살이 배긴 가운뎃손가락을 만지작거렸어요. 다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려놓은 연필을 쥐고 방금 생각난 것들을 마저 써 내려갔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경우에는 가장 더웠던 여름, 가장 진한 사랑을 나눈 여름보다도, 쓰기를 결심하게 한 그 날 마신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가장 기억에 남거든요. 덕분에 지금도 얼음 동동 띄운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고 있으니까요. 아이스커피는 너무 밝고 녹아내릴 듯 질척이는 이 계절과 반대로 냉정 쌉싸름하고 산뜻해서, 흐리멍덩하던 지점을 또렷하게 해주잖아요. 거꾸로 생각해보면 가장 선명한 아이스커피의 맛으로 기억되는 그 해가 가장 뜨거웠던 여름이 아닐까 추론해보았어요. 여러분이 마신 아이스커피는 언제 가장 생생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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