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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으로 가는 뽕짝 메들리

셜리. 2020. 3. 12.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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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으로 가는 뽕짝 메들리

10대 이전에 음악을 듣는 방법은 엄마가 창문과 베란다 문을 열고 틀어놓은 심수봉의 구슬 픈 목소리나 80년대 올드팝 테이프를 듣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256메가바이트 짜리 엠피쓰리를 사면서 내 취향의 곡을 모으는 재미를 알았다. 이제는 매달 정기결제되는 스트리밍 사이트를 이용해 1,000여 곡의 음악을 플레이리스트에 넣어두고 침대 위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는데 여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산업 의 발전으로 개인의 문화 향유 방식이 손쉽게 바뀐 셈이다. 중학교 때 친구들과 씨디 플레이 어로 듣던 동방신기 앨범이나 고등학교 때 체육복 아래로 몰래 이어폰 줄을 넣어 야자시간마 다 들었던 사춘기 시절의 힙합 음악으로 언제든지 빠져들 수 있다. 그렇게 오래 들어온 애청 곡들이 많은데 최근엔 뜬금없이 송대관이나 현철 아저씨가 부른 트로트를 반복해 듣는다.

에픽하이의 미쓰라진은 트로트를 "땡뻘같은 하루에 유일한 동반자"라고 했지만, 그처럼 거창 한 이유로 2000년대 중년의 마음을 사로잡은 토속 음악에 취한 것은 아니다. 최근 33퍼센트 의 시청률을 올리며 대중의 주목을 받은 미스터트롯 열풍에 힘입어서도 아니다. 밤낮이 바뀌 어 저녁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친구가 신나는 일이 있었는지 태진아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 를 같이 듣자는 카톡을 남겨두었다. 몽롱한 가운데 시작부터 간드러지는 색소폰의 현란한 연주는 알 수 없이 가슴을 간지럽히며 잠을 깨웠고 쿵 짝 쿵 짝 두드리는 비트와 풍부한 코러스 는 머리털까지 빨리 일어나라고 귀를 울렸다. 사포질하지 않아 거칠거칠한 나무합판 같은 태진아 아저씨의 목소리가 "눈이라도 마-주쳐야아지"라고 하면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절대 사랑에 빠질 수 없을 것 같은 설득에 당해버린다. 뽕짝의 빠른 bpm은 내 심장박동을 타고 뛰어 혼란 스러운 밤 열한 시에 미뤄둔 설거지를 속도감 있게 마치고 노트북을 끌어당겨 글을 쓰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256메가바이트 짜리 엠피쓰리에 몇십 곡 되지도 않는 노래를 담아 이어폰으로 귀를 딱 틀어 막고 스위트박스나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듣기 전까지 음악 취향은 가족끼리 쉽게 공유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매주 일요일마다 자가용으로 1시간 거리의 꽤 먼, 도개온천이라는 곳에 목욕 하러 다녔다. 나도 동생도 무지 어려서 부모님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서로의 견해를 주고받거나 나눌 만큼 성숙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산속 깊숙이 자리한 온천을 찾아가며 차창을 내리고 논밭의 거름 냄새를 맡으며 라디오를 듣곤 했다. 아빠는 그때부터 트로트를 상당히 좋아했는데 의미도 알지 못하면서 큰 소리로 뽕짝 가사를 따라 부르는 초등학생 딸내미 아들내미를 보며 "느그 진짜 웃긴데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목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마주친 저수지 둑에서 온 가족이 봄 냉이를 캐면서 라디오에서 들은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이름표를 붙여 내 가슴에, 확실한 사랑의 도장을 찍어."하고 현철 아저씨를 따라 꾸밈음을 흉내 내면 어떻게 그렇게 노래를 금방 외우냐며 딸 아들이 트로트 부르는 것을 반기곤 했다.

나의 자유의지로 좋아하게 된 곡들이 아닌데도 20년이 지난 지금 트로트를 들으면 전자피아노나 드럼 소리에 맞춰 어깨가 들썩여버리는 것이다. 하쿠나마타타 대신 쿵쿵따리 쿵쿵따. "오늘 하루 힘들어도 내일이 있으니 행복하구나"라는 유행가 노래 가사를 들으면 오늘 하루가 힘들긴 했던가 하며 흥에 겨워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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