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E V I E W/글방에서

권여선, <주정뱅이>에서 발췌한 글에서 시작하는 글쓰기

셜리. 2019. 11. 11.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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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그녀는 점심 식사 후에 소주를 마실 참이었다.“

 

낮부터 소주를 마신다고 하니까 사연 있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오히려 무슨 사정이 있을 때 혼자 술을 마시는 쪽은 아니었다. 물기가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는 배를 썰어서 안주로 삼아야지.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냥 한가로운 백수 시절의 대낮을 즐기는 것이다. 일이 있던 때를 생각해봐. 창밖에 아무리 화려한 햇빛이 너울거려도 그 근처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었거든. 사무용 의자에 묶여서 여덟 시간을 버티는 고문을 받는 것 같았단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돈이 조금 없어도 가을바람과 낮의 자유, 얼기 직전의 소주가 있잖아.

소주잔에 찬 소주를 졸졸졸 따르는 것처럼 혹자는 그녀에게 마음을 열어 보이라고 하곤 했다. 그런데 그녀는 여러분이 보는 것이 전부인 인간이다. 안쪽은 잿빛이고 바깥쪽은 담갈색이어서 뒤집어 입을 수 있는 자켓이 있다고 치자. 그녀는 그냥 그런 사람인 거야. 언제든지 자신을 까뒤집어 사람들에게 속을 내보여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 왜 술을 좋아하냐고, 자주 먹냐고 물어본다면 그 대답은 절대 슬프거나 잠이 오지 않아서가 아니다. 술은 맛있잖아요? 그리고 마시면 즐거워져요. 그녀가 더 쉽게 나불거릴 수 있는 원동력을 주니까 그렇게 왐빵 마셔대는 것이다. 말하자면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행동을 하고 보는 편의 사람이다. 그러니까 지금도 저렇게 소주를 반병이나 비우고, 평소에 좋아하지도 않는 배를 두 개나 깎아 먹고 방바닥에 곯아떨어져 버렸다. 그녀의 속마음이 궁금하세요? 그냥 저 자켓을 뒤집어 보라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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