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지 몰라서 가지고 있지 않아요.
(역경에 관하여 글쓰기, 2020년 3월 첫 번째)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천상병의 <귀천>이라는 시를 읽고 있었다. 가르치는 선생님은 경기도 의정부 출신으로 30대 초반의 표준어를 구사하는 남자였다.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경상남도 최남단인 거제도에 있어 학생이고 선생이고 갯내음 나는 영남 사투리를 썼다. 그러니 이 선생님이 하듯 표준말 하는 것을 직접 들으면 지나치게 다정해서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고 속이 간지러워지던 때였다. 선생님의 고향과 우리 학교의 거리만큼 그의 언어는 멀게 느껴졌다. 그런데 <귀천>을 읽으면서 선생님이 내뱉은 탄식은 순간 나에게 훅, 하고 끼쳤다.
"아, 왜 고통을 겪어야 더 좋은 글이 나오는 건지.“
수업이 아닌 선생님의 진심이었다. 그도 글을 쓰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깊은 사유와 역경을 헤친 경험이 있어야 심도 있는 글이 나온다는 것은 많은 문제를 풀수록 점수가 올라간다는 수학의 법칙과 같았다. 당시 나는 더 좋은 글을 남기지 못할까 봐 난항이 없었던 내 생이 두려웠다.
10년이 더 지났는데 지금까지도 내 인생엔 딱히 역경이랄게 없다. "비바람 몰아쳐도 이겨내고,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나"는 거친 경험은 허락되지 않았다. 처절하게 매달린 사랑에 가차 없이 차인 적도, 엄마 아빠가 불화를 겪은 적도, 꿈처럼 원했던 회사에 최종 탈락한 적도 있지만 그게 역경인가? 불안에 떨며 10차선 도로를 건너는 것도 강가에 나가 얼굴 흠뻑 젖도록 눈물 흘리던 새벽도 다 지나갔다. 가끔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생겨도 내용만은 깨끗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라디오처럼 무리 없이 이어져가고 있어서 나는 괜찮다.
'몸에 배어있는 경상도 말처럼 쿨한 척하려는 모양이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뒤져 봐도 내 삶에 역경이라 여겨지는 게 없을 뿐이다. 역경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어서 찾을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다. 사유가 없어 고난이 없는 것일 수도 있고 고난이 없어 사유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순탄한 팔자를 타고났다는 점쟁이의 말을 믿기로 해서인지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해버린 것이다. 믿음 하나가 굳건하니 이처럼 속이 편하다.
천상병 시인은 사는 내내 정치적 수모와 가난, 간경화라는 병마까지 앓았지만, 꾸준히 성당과 교회에 나가며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살았다고 한다. 보는 이들은 애달프다 했던 생이지만 시인 자신은 그의 삶을 소풍으로 표현하지 않았던가. 되로 술을 마시며 글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았던 작가의 <귀천>은 고난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생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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