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방글방 5월 두 번째 : 중독
우울함에도 중독성이 있다지. 우울이 머리통을 잠식하는 기분은 이런 거야. 대개는 내 몸 크기만한 침대 위에서 일어난다. 손수 고른 큰 베개에 머리를 대고 얼마 전에 빨아서 바삭한 이불을 몸에 감고 남쪽으로 난 창에서 오전 11시의 햇살을 받고 있는데도 슬프다. 슬프다는 말은 평소에 잘 쓰지를 않는데도 슬프다. 오랜만에 온몸을 덮친 감정 때문에 열두 시간 붙어있던 매트릭스 위의 허리가 뻣뻣하게 굳어버린다. 기력이 없어서 먹지 않고 먹지 않아서 기력이 없다.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어. 통장 잔고가 적지는 않아도 많지 않고, 내일이나 모레까지 해야 하는 일은 있지만 당장 할 일은 없는 상태여서 약간 긴장감을 느껴야 하는데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다. 색색깔로 현란하게 돌아가는 핸드폰 게임을 손가락으로 즐기면서 사실 전혀 즐겁지 않다. 그리고 나에게 묻지, 이유 없는 슬픔은 없을 것 같으니까. 어제 그제 있었던 일들을 헤집어 본다. 더블 클립에 끼인 채로 책장에 빽빽하게 꽂혀있는 오래된 문서를 뒤적거리듯이. 아 왠지 그 애 때문인 것 같다. 발견된 문서의 제목은 이마 앞에 걸리고 나방 애벌레가 종이를 갉아먹듯이 뇌리를 파고 들어간다. 죄책감이란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뭐가 고맙다는 걸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여기까지 나를 보러 온 이유는 뭘까? 왜 나의 손에 낚아채지지 않았나. 외롭다. 종이에 뚫린 구멍의 크기만큼 패배감이 든다. 14일의 쿨타임을 가지고 그때쯤 말을 걸러 가볼까. 실전에 강하니까 카톡 대신 입술로 쭈글쭈글 불편한 관계를 평평하게 다려놓을 수 있을까. 글자들은 머릿속을 맴맴 돌면서 뭉텅이가 되어 물이 빠지지 않는 하수구를 종이죽처럼 막아버렸다. 눈이 부시게 환한 알전구 아래서 머리가 무거워 일어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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