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끝나가며 업무상 나와 만날 일이 잦아진 A는 가슴까지 오던 머리를 단발로 잘랐다. 7월 중순까지 파운데이션으로 덮였던 얼굴과 끈적거리던 립글로즈를 빛내던 입술은 담백해졌다. 주야장천 대중을 대상으로 탈코르셋 해야 한다고 말해왔으면서 A에게 슬쩍 질문해보았다. "A, 왜 머리 잘랐어?" "어, 그냥 너무 무거워서." A는 쑥스러움 반 멋쩍음 반인 웃음으로 알아들으라는 듯 대답했다. 이 대화는 처음이 아니다.
여섯 달 전에는 친구 세 명과 봄맞이 소풍을 갔다. 커다란 분수가 있는 호수 근처 공원이었다. 나 포함 두 명은 얼굴 편안한 상태, 나머지 두 명은 소풍 맞이 메이크업을 하고 왔다. 잔디가 돋아나기 시작한 비탈에 돗자리 펴고 앉아 맥주를 마시는 데 한 친구가 나에게 질문했다. "쟤네 둘 화장하고 온 걸로 왜 뭐라 안 해?" 나는 알아들었으면 해서 어이없음 반 재밌음 반인 웃음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친구는 알아듣지 못했다. "어? 왜 뭐라 안 하냐고. 네가 보기에 거북하지 않아?" 나 보기 불편할까 봐 평소 하고 다니는 화장을 안 하고 왔다는 친구가 재차 캐묻는다. 어디서부터가 복잡한 감정의 시작인지 설명하기가 여간 곤란하지 않다. "야 임마, 그럼 이 공원 사람들 100명을 다 쫓아다니면서 뭐라고 하게?" 그제서야 친구가 반쯤 수긍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 전 해 가을이 시작될 때쯤, 당시에도 일 때문에 일주일에 몇 번을 보던 A는 어느 날 머리를 턱까지 잘랐다. "A, 머리 잘랐네?" "어, 그냥 걸리적거려서." A는 그때도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뭔가 쑥스럽다는 그 웃음 후 해외 발령을 다녀온 A는 1년 만에 머리가 다시 작년 여름처럼 길었고 번쩍이는 립글로스로 시선을 끌었다. 그렇지만 여성주의 독서모임을 한다던가, <여자는 인질이다> 같은 책을 읽었다는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결심이 섰나 보다. 아주 싹둑 단발로 자른 게 시원하기도 하고 서늘하기도 했다. 이들은 내가 없으면 코르셋을 주워 입는다.
친구는 나를 만날 때와 남자 친구를 만날 때의 차림새가 달라 부모님이 알아보신다는 말을 해서 내 머릿속을 부글부글 끓게 했다. 나는 그들의 친구일 뿐인데 이런 순간은 나를 교관이나 교도관으로 만든다. 공원 가득한 사람들을 쫓아다닐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로 친구들에게도 탈코르셋을 강요하지 않는데, 이들이 나를 학생 주임처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날 보는 순간이라도 코르셋을 차지 않으니 기뻐해야 하나? 내 시야를 벗어나면 허리 꽉 조이고 높은 힐에 올라서니 괘씸해해야 하나? 코르셋의 유해함과 탈코르셋 운동의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한 대가로 양 측 모두 속이 불편하다. 이런 관계는 손절하면 편해진다던데, 손을 자르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질 인연이라 생각해 그러지도 못하고 울렁울렁 토기만 느낀다.
운동가로서의 나는 밥을 국에 말아 꼭꼭 씹어 삼키듯이 울분은 잘 넘기고 더 자주 그들 곁에 있기를 택한다. 내가 없으면 이라는 말이 너무 큰 책임감으로 느껴져서 위장에 돌덩이를 얹은 듯 부담스럽고 서럽더라도, 내가 있으면 100명이었을 코르셋 찬 사람은 99명으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99명은 내가 없을 때 볼 수 없던 한 명의 존재를 볼 수 있다. 누군가는 마음을 먹으려는 듯 내 머리만 한참 쳐다보다가 짧은 머리카락을 만져도 보고, 그러다 정말 머리를 자르거나 그러지 않는다. 나만큼이나 그들의 마음도 울렁이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다만, 코르셋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페미니즘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순간에 계속해서 머무르는 것은 과거로부터 답습한 여성성을 여전히 탐구하고 즐길 시간을 늘릴 뿐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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