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방 글방 7월 두 번째 : 부끄러운 일
10대 애들은 좋아하면 대충 시비를 걸고 보는건가. 사랑을 표현할 방법을 몰라서 그랬던 건지 내 성미가 그랬던 건지 모르겠지만 엄마 아빠보다 시간을 많이 보내는 친구들에게 사랑을 느끼는 일이 잦았다. 좋아했던 애들을 대충만 헤아려봐도 손가락 발가락 다 써야 셀 수 있을 정도로 정들면 곧잘 이건 사랑이야!하고 머리속이 소리쳤다. 그 스무 명 중 반장이 두 명 전교회장은 한 명. 그 자리가 만든 후광을 사랑한건 아니었는데 희한하다.
뭘 배우고 있던 날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수학 선생님 때문에 얼굴이 새빨개졌던 건 생각난다. 16살의 나는 지금의 나와 마찬가지로 수업시간에 손을 들고 발표하길 즐기는 학생이었고 선생님의 신변잡기적 잡담에도 눈치를 보지 않고 응수하는 편이었다. 걔를 좋아하니까 걔한테 일어나는 모든 일에 참견을 하고 싶었나보다. 수학 수업이 이어지는 중에 선생님이 반장에게 뭔가를 물어봤는데 내가 꼽을 줬던가, 시비를 걸었던가, 선생님과 상관없이 걔한테 말을 걸었다. 두 번 정도 그렇게 하니까 선생님이 “야, 니 해빈이 좋아하나? 왜자꾸 해빈이한테 시비거노?”라고 말을 했다. 내 진심이 너무 적나라하게 직통으로 날아와 꽂히니까 약간 충격을 받았는지 영혼이 내 몸을 벗어나가 대각선 뒷자리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의연뻔뻔하던 내 얼굴이 턱부터 이마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좋아하지 않았다면 안그랬을텐데! 아 선생님! 하는 생각이 들지만 차마 말을 할 수도 없다. 티를 실컷 내왔으면서도 그 말을 직접 듣고 싶진 않았던 거다. “아, 아, 아닌데요?”라고 더듬는 사이에 서른 명의 친구들이 나를 막 다 쳐다보고 있는 것 같고. 실제로 쳐다보고 있었고. 선생님의 눈동자는 안경 너머에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고. “엄맘마 얘봐라, 진짜 좋아하는가보네. 니 얼굴 빨개졌다야~!” 고개를 딸랑딸랑 흔들며 아니라고 했지만 아마 내가 반장을 좋아한다는 건 나만 비밀이라고 생각하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던듯 하다.
내 성격 더러운 걸 아는 친구들은 그 사건에 대해 말을 하면 내가 버럭 화를 낼거라 예상한건지 아무도 언급하진 않았지만 그 수업 다다음 날이었나. 중간고사를 치려고 한 칸씩 띄운 책상에 앉아 새벽까지 시험 범위 정리한 내용을 보고 있는데, 해빈이가 스윽 내 곁으로 왔다. 나는 너무너무 불안했다. “어..너도 들었겠지만 나 어제부터 희진이랑 사귀어. 미안해.” 범생이 연화는 그런건 중요치 않다는 듯 태연하게 “어어 니가 왜 미안하노? 시험 준비하러 가라. 잘치야지.”라고 했지만 이면지 뒷장에 빽빽하게 쓰인 손글씨를 보는 눈동자는 약간 흔들리고 있었다. 야무진 학생이었으므로 시험이나 성적에 지장은 없었지만 눈물이 조금 비어져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 그건 해빈이가 희진이랑 사귀기 시작해서가 아니라 내 비밀이 나 말고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것 뿐 아니라 해빈이까지 알게 됐다는 수치심에서였다. 물론 내가 짝사랑을 지속할 수 없게 됐다는 억울함도 조금 있었고.
짝사랑을 워낙 대놓고 하는 편이라 내가 짝사랑을 시작하면 반이건, 학과건, 단과대건 동네방네 소문이 나는건 여전한데 이 기억은 너무나 또렷해서 떠올리면 침샘이 간지러운 느낌이 든다. 생머리가 길고 투명한 테를 끼고 있던 선생님과 건너편 분단에서 물끄러미 나를 보던 반장. 시험이 끝나고 어쩐지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던 희진이까지. 침샘이 간지러운 건 단지 창피해서가 아니라 곱씹을 만한 맛난 학창시절의 기억이기도 해서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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