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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E V I E W 41

블랙홀이거나 호수이거나

2021년 4월 두 번째_확장성 우주는 한순간 뻥 하고 터지며 만들어졌다는데 나도 언젠가 터지게 될까? 요즘 터질 것 같다고 느낄 때는 너와의 문자가 끊겼다가 다시 "이거 보고 언니 생각이 났어요."라는 문장이 도착했을 때. 엎드려 뻗친 자세로 지구를 반대편으로 밀며 팔 근육을 키워 보려 애쓸 때. 심장도 섬유조직도 터지지가 않지만 어쩐지 터질 것 같잖아. 폐부 가득 벌써 초여름인 척 불어오는 미지근한 바람을 채워 넣을 때. 머리엔 산소가 들어차고 봄 대신 몸이 더워진다. 어제는 집에서 작업을 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헬스장에 가버렸다. 안 되긴 뭐가 안돼? 러닝 머신 위에 올라가서 평소보다 더 경사진 코스를 더 빠르게 뛰었다. 그 모습을 봤다는 트레이너 선생님은 "혹시 일에서 스트레..

달콤한 고통을 구매해보았습니다.

달콤한 고통을 구매해보았습니다. 2021년 4월 첫 번째_한 번도 좋아해본 적 없는 것 사서 하는 고생을 즐기는 이들이 있다. 대학생 때 자전거를 타고 국토대장정을 했다던 가정 선생님은 씻을 곳이 없어 물티슈로 몸을 닦고 사타구니가 벌겋게 부어올랐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땐 세상이 좋아서 민박집에 사정해 밥이라도 얻어먹었지 너희가 대학생이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 밥은 왠지 흰 쌀밥에 집에서 먹던 김치가 딸려 나왔을 것 같다. 고소하고 쫀득한 밥알 맛을 음미할 수 있는 식사였을 것 같다. 맨밥이 맛있는 만큼 허기의 시간도 길었을 것이다. 목은 얼마나 탔을까, 안장에 얹은 허리가 쑤시진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국토대장정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아이패드 화면으로 보는 이구아수 폭포..

공유지의 희극

공유지의 희극 2021. 4월 첫번째/나의 불가침 영역 수업을 마치고 자취방에 갔더니 머리에 축축한 수건을 두른 친구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나는 좁은 현관의 신발장 위에 무거운 백팩을 내려놓고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갔다. 습기가 훅 끼치기에 화장실의 작은 창문을 열었다. 언제 왔냐고 물었더니 앞 수업이 끝나자마자 와서는 한숨 자고 일어났다고 한다. 수건을 새로 꺼내 손을 닦고 저녁으로 뭘 먹을지 이야기하는 동안 한 명의 친구가 또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날은 싸구려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내 집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항상 있었다. "너 몸 좀 사려." 작년에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 친구한테 혼이 났다. 좋아하던 사람한테 마음 반을 내주고 남은 반에 들어오라고 문을 열어두고, 계좌에서 카드..

<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

2020년에 읽기 시작하여 책갈피를 꽂아 뒀다가 2021년 비오는 삼일절에 완독함. 누구도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p. 58 / 누구도 여자로 태어나지 않는다. 여자가 되는 것이다. (...) 그러나 미국 등지의 페미니스트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은 여전히 여성 억압의 근본은 역사적일 뿐 아니라 생물학적이라고 믿는다. (...) 거칠고 잔인한 남자들은 사냥을 한 반면(생물학적인 성향 때문에) 여성은 문명을 만들었다는 모권과 '선사'에 대한 믿음은 지금까지 남성계급에 의해 생산된 역사 해석을 생물화하는 것과 같은 꼴이다. p.74 / 섹슈얼리티는 여성 개인이나 주체의 표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폭력의 사회적 제도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소위 모든 사적인 문제가 계급 문제라는 것을 보여..

장래희망을 그려보세요.

2021년 1월 두 번째(색연필) 장래희망을 그려보세요. 대학교 과방에서 시시껄렁한 잡소리를 하며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한 선배가 복사한 종이를 한 뭉치 들고 들어오더니 설문조사를 하란다. 과목 이름이 '선거와 조사'였나 아무튼 난 듣지 않는 전공 수업이었는데 과제로 조사 방법을 정하고 문항을 구성해서 실제로 사람들한테 설문을 받아와야 한단다. 시간도 많고 거절할 깜냥도 안되는 2학년 여자애들은 합판으로 만든 테이블 위에 엎드려서 열심히 답안에 체크를 했다. 근데 문항이 이런 거였다. 졸업 후 몇 년 안에 취업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십니까? 취업한 이후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연봉은 얼마입니까? 실제로 희망하는 연봉은 얼마입니까? 갤럽이나 한국리서치에서 하는 설문조사만 해보다 선배가 만든 문항을 보니..

나에게 말을 가르쳐준 여자_서한나 칼럼

[서울 말고] 나에게 말을 가르쳐준 여자 / 서한나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76083.html#csidxecb8b3c4499a056b1c1abff5de1be84 서한나 작가의 한겨레 칼럼 '나에게 말을 가르쳐준 여자'를 읽으며 떠오른 생각을 기록해두고 싶어 노트북 앞에 앉았다. 교수는 로봇 같고 도서관엔 책도 없는데 밤이라고 다를까.(중략) 스물셋,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친구가 말했다. 너를 알아봐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게 중요할 것 같아. 어른이 필요했지만 아무도 없던 때. 정말 그 도서관에 책이 한 권도 없던 것은 아니다. (작가와 나는 동대학 출신이니 도서관이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알고 있다.) 인공지능 교수가 2010년대 중반부터 강..

Be my scent

2020년 12월 How did you bloom in my worried heart? How did you fill up my empty heart?* 그 애는 자신에게 체취가 있다고 하는 게 싫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방에는 항상 체리 향 캔들이 풍성한 빛을 받아 맑게 찰랑였고 선반에는 향기 나는 것들이 가득했다. 프리지아와 멜론, 자두 향이 섞여 새콤달콤한 향수, 코튼 플라워 베이스의 백합 향 바디 미스트가 눈에 띄었다. 블루베리와 크랜베리 냄새가 나는 샴푸와 린스는 바디워시와 로션까지 세트로 갖춰져 줄을 서 있었다. 그 애 옷을 입으면 나는 오렌지 향은 포근했다. 그 애 어깨에 얼굴을 기대면 금방 과일 꿈을 꾸는 기분이 들었다. 출근한 후에 혼자 눈을 뜬 이불에선 그의 냄새가 났다. 자기 냄새라는 ..

나에 대해 예상하셨다면서요

내가 그런 말을 전할 때부터 예상하셨다면서요뭘 예상하셨어요.1. 그 사람한테 너무 많이 정을 줄까봐2. 니가 새롭게 관계를 맺게 됐을 때 앞뒤 따지지 않고 정을 줄 것 같아3. 다 그 얘긴데 그냥 니가 뭐야 녹취록이야?4. 나 이런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말 못해5. 하하하하하6. 취재를 당해본 적이 없어7. 좆까 시발8. 아니..니가 너무 정이 많은 사람이라 그 사람한테 정을 원할 사람이야. 그 사람은 답을 줄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니가 그걸 갈구할까봐 걱정이야.

한강을 가지고 싶으세요?

한강을 가지고 싶으세요? 10월 둘째주 서울 출장을 마치고 대전으로 돌아오는 밤기차에 동료와 나란히 앉았다. 열 시가 되기 직전이었다. 큰 건 하나 끝낸 다음이라 후련한 마음에, 연말이 다가온다는 초조한 기분에 한산하고 안락한 평일 열차에서 동갑내기 동기 둘만 진지한 상태였다. "나는 말이지, 예전에는 아파트나 자가용 같은 게 성공을 결정짓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이제는 아니야, 정말로. 평수나 브랜드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내가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집, 마음 편하게 탈 수 있는 차면 돼.“ 나는 일정부분 공감하면서도 여전히 외제차는 갖고 싶다고 답했다. 텔레비전은 연예인들의 일상을 비추며 햇빛이 쏟아지는 널찍한 통유리창 아파트야말로 성공의 척도라는 것을 매일같이 전시했다. 자본주의의 귀족이..

비오는 날 깜깜한 꿈

환절기 감기몸살에 걸려서 하루종일 잠만 잤더니 꿈을 여러가지 꿔서 혼란스럽다. 몸은 여전히 으슬으슬하다. 정신나간 판타지와 총기 액션이 가미된 가족물 등 기억나는 서너가지 꿈 중에 하나는 안지 얼마 되지 않은 지인이 나오는 꿈이었다. 앞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내게 찜찜한 기분을 남긴 사람이어서 그런지 꿈에서도 그랬다. 그 사람은 나에게 뭔가를 빚져서 과자를 한 봉지 사주고 돌아가려는데 비가 쏟아졌다. 킥보드를 타고 왔길래 비 맞고 갈거냐고 했더니 괜찮다고 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우산을 손에 들려 줬다니 고맙다며 한 손으로 우산을 들고 집을 가더라. (그게 가능한가? 킥보드를 안타봐서 모르겠다.) 며칠 후 우산과 나에게 빌린 책을 돌려주러 왔는데 그 책이 생각보다 별로였다고 한다. 자기가 읽기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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