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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E V I E W 41

왜 머리 잘랐어?

여름이 끝나가며 업무상 나와 만날 일이 잦아진 A는 가슴까지 오던 머리를 단발로 잘랐다. 7월 중순까지 파운데이션으로 덮였던 얼굴과 끈적거리던 립글로즈를 빛내던 입술은 담백해졌다. 주야장천 대중을 대상으로 탈코르셋 해야 한다고 말해왔으면서 A에게 슬쩍 질문해보았다. "A, 왜 머리 잘랐어?" "어, 그냥 너무 무거워서." A는 쑥스러움 반 멋쩍음 반인 웃음으로 알아들으라는 듯 대답했다. 이 대화는 처음이 아니다. 여섯 달 전에는 친구 세 명과 봄맞이 소풍을 갔다. 커다란 분수가 있는 호수 근처 공원이었다. 나 포함 두 명은 얼굴 편안한 상태, 나머지 두 명은 소풍 맞이 메이크업을 하고 왔다. 잔디가 돋아나기 시작한 비탈에 돗자리 펴고 앉아 맥주를 마시는 데 한 친구가 나에게 질문했다. "쟤네 둘 화장하고..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_리베카 솔닛

를 3년 전에 읽은 이후 다시 잡은 리베카 솔닛의 책. 순진한 냉소주의 p. 114 / 비전문가들도 나쁜 데이터와 더 나쁜 분석을 동원하여 미래의 불가피성, 현재의 불기능성, 과거의 실패를 확신에 차 선언한다. 나는 이런 발언의 바탕에 깔린 심리 상태를 순진한 냉소주의라고 부른다. 이런 심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 가능하다는 감각을 잃게 만들고, 어쩌면 책임감마저 잃게 만든다. p. 123 / 순진한 냉소주의의 대안은 무엇일까? 무엇이든 발생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 우리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 수 없을 때가 많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앞으로 벌어질 일은 보통 축복과 저주의 혼합일 테고 상당히 긴 시간에 걸쳐서 펼쳐지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역사적 기억은 이런 태도를 지지해준..

PMS

규방글방 5월 두 번째 : 중독 우울함에도 중독성이 있다지. 우울이 머리통을 잠식하는 기분은 이런 거야. 대개는 내 몸 크기만한 침대 위에서 일어난다. 손수 고른 큰 베개에 머리를 대고 얼마 전에 빨아서 바삭한 이불을 몸에 감고 남쪽으로 난 창에서 오전 11시의 햇살을 받고 있는데도 슬프다. 슬프다는 말은 평소에 잘 쓰지를 않는데도 슬프다. 오랜만에 온몸을 덮친 감정 때문에 열두 시간 붙어있던 매트릭스 위의 허리가 뻣뻣하게 굳어버린다. 기력이 없어서 먹지 않고 먹지 않아서 기력이 없다.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어. 통장 잔고가 적지는 않아도 많지 않고, 내일이나 모레까지 해야 하는 일은 있지만 당장 할 일은 없는 상태여서 약간 긴장감을 느껴야 하는데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다. 색색깔로 현란하게 돌아가는 ..

6반 반장한테 시비 거는 애가 누구야

규방 글방 7월 두 번째 : 부끄러운 일 10대 애들은 좋아하면 대충 시비를 걸고 보는건가. 사랑을 표현할 방법을 몰라서 그랬던 건지 내 성미가 그랬던 건지 모르겠지만 엄마 아빠보다 시간을 많이 보내는 친구들에게 사랑을 느끼는 일이 잦았다. 좋아했던 애들을 대충만 헤아려봐도 손가락 발가락 다 써야 셀 수 있을 정도로 정들면 곧잘 이건 사랑이야!하고 머리속이 소리쳤다. 그 스무 명 중 반장이 두 명 전교회장은 한 명. 그 자리가 만든 후광을 사랑한건 아니었는데 희한하다. 뭘 배우고 있던 날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수학 선생님 때문에 얼굴이 새빨개졌던 건 생각난다. 16살의 나는 지금의 나와 마찬가지로 수업시간에 손을 들고 발표하길 즐기는 학생이었고 선생님의 신변잡기적 잡담에도 눈치를 보지 않고 응수하는 ..

뭔지 몰라서 가지고 있지 않아요.

뭔지 몰라서 가지고 있지 않아요. (역경에 관하여 글쓰기, 2020년 3월 첫 번째)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천상병의 이라는 시를 읽고 있었다. 가르치는 선생님은 경기도 의정부 출신으로 30대 초반의 표준어를 구사하는 남자였다.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경상남도 최남단인 거제도에 있어 학생이고 선생이고 갯내음 나는 영남 사투리를 썼다. 그러니 이 선생님이 하듯 표준말 하는 것을 직접 들으면 지나치게 다정해서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고 속이 간지러워지던 때였다. 선생님의 고향과 우리 학교의 거리만큼 그의 언어는 멀게 느껴졌다. 그런데 을 읽으면서 선생님이 내뱉은 탄식은 순간 나에게 훅, 하고 끼쳤다. "아, 왜 고통을 겪어야 더 좋은 글이 나오는 건지.“ 수업이 아닌 선생님의 진심이었다. 그도 글을 쓰는 ..

조주빈, 이지민, 강종무의 엄벌을 탄원합니다.

조주빈, 이지민, 강종무의 엄벌을 탄원합니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텔레그램에서 일어난 'n번방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암암리에, 그러나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성 착취 사건의 면모가 수면으로 떠올랐습니다. 피고인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잔혹하고 끔찍한 방식으로 피해자의 성을 착취하는 데 앞장섰으며 성 착취 영상을 공유, 판매하는 수법으로 금전적 이득을 취하기까지 했습니다. 피고인의 비인간적인 범죄행위는 국민 대다수를 경악하게 했고 여성, 아동과 같은 사회적 약자의 불안감과 공포심을 불러일으켰으며 피해자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바로 지금, 국민의 안전과 안녕을 위하여 사법부가 결단을 내릴 적기입니다. 지금껏 디지털 성착취에 대한 법안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범죄자들은 솜방망이..

다음 서커스를 향해 가는 길에

다음 서커스를 향해 가는 길에 "다음번에 또 뵙겠습니다." 가능하다면 말이죠. 셜리는 뒷말을 숨기고 달러화 몇 장이 든 봉투를 공연자에게 건넸다. 입장료와 스낵 판매로 번 120달러에서 40달러를 뺀 금액이었다. 남은 금액을 점퍼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천막을 해체하며 주차장을 바라봤더니 오늘 관중의 전부였던 네 명이 무어라 이야기를 하며 한꺼번에 캐딜락에 올라타는 게 보였다. 셜리만큼 젊은 여성들이었다. 천막을 모두 걷어 트럭의 짐칸에 실었다. 운전석에 올라탄 셜리는 테이프를 넣어 좋아하는 음악을 틀었다. 아무리 사양산업이라지만 너무한 거 아닌가. 샌프란시스코 지역 축제 부스 전체를 통틀어 가장 적은 관객이 왔던 게 틀림없다. 눈물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괜히 하-이 웨이 투 헬! 하고 트럭 스피커..

온천으로 가는 뽕짝 메들리

온천으로 가는 뽕짝 메들리 10대 이전에 음악을 듣는 방법은 엄마가 창문과 베란다 문을 열고 틀어놓은 심수봉의 구슬 픈 목소리나 80년대 올드팝 테이프를 듣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256메가바이트 짜리 엠피쓰리를 사면서 내 취향의 곡을 모으는 재미를 알았다. 이제는 매달 정기결제되는 스트리밍 사이트를 이용해 1,000여 곡의 음악을 플레이리스트에 넣어두고 침대 위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는데 여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산업 의 발전으로 개인의 문화 향유 방식이 손쉽게 바뀐 셈이다. 중학교 때 친구들과 씨디 플레이 어로 듣던 동방신기 앨범이나 고등학교 때 체육복 아래로 몰래 이어폰 줄을 넣어 야자시간마 다 들었던 사춘기 시절의 힙합 음악으로 언제든지 빠져들 수 있다. ..

<밤의 해변에서 혼자> 김민희 주연, 홍상수 감독

제목 : 밤의 해변에서 혼자 감독 : 홍상수 주연 : 김민희 본 날 : 2020. 01. 29. 평이 좋아 보러 갔던 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 날 인스타그램에 "민희 언니하고 싶은 거 다 해"라고 적었더니 다음날 홍상수 감독과의 스캔들이 터졌다. 가 2016년 작이고, 는 2017년 작이니 김민희와 홍상수에 대한 가십거리가 잊히기 전에 이 영화가 개봉했다. 게다가 는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황금곰상) 후보에 올랐고 김민희는 이 작품을 통해 여우주연상(은곰상)을 탔기에 단연 화제작이라 할 수 있다. 글쎄, 지극히 정적이고 기승전결도 없는 이 작품이 어떻게 이러한 평가를 받았는지 의아한 관객도 많을 것이다. 나 또한 국제 영화제의 기준에는 완전히 문외한이고 영화에 대해 모르다시피 하기 때문에..

권여선, <주정뱅이>에서 발췌한 글에서 시작하는 글쓰기

"그러나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그녀는 점심 식사 후에 소주를 마실 참이었다.“ 낮부터 소주를 마신다고 하니까 사연 있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오히려 무슨 사정이 있을 때 혼자 술을 마시는 쪽은 아니었다. 물기가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는 배를 썰어서 안주로 삼아야지.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냥 한가로운 백수 시절의 대낮을 즐기는 것이다. 일이 있던 때를 생각해봐. 창밖에 아무리 화려한 햇빛이 너울거려도 그 근처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었거든. 사무용 의자에 묶여서 여덟 시간을 버티는 고문을 받는 것 같았단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돈이 조금 없어도 가을바람과 낮의 자유, 얼기 직전의 소주가 있잖아. 소주잔에 찬 소주를 졸졸졸 따르는 것처럼 혹자는 그녀에게 마음을 열어 보이라고 하곤 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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