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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E V I E W/글방에서 31

권여선, <주정뱅이>에서 발췌한 글에서 시작하는 글쓰기

"그러나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그녀는 점심 식사 후에 소주를 마실 참이었다.“ 낮부터 소주를 마신다고 하니까 사연 있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오히려 무슨 사정이 있을 때 혼자 술을 마시는 쪽은 아니었다. 물기가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는 배를 썰어서 안주로 삼아야지.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냥 한가로운 백수 시절의 대낮을 즐기는 것이다. 일이 있던 때를 생각해봐. 창밖에 아무리 화려한 햇빛이 너울거려도 그 근처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었거든. 사무용 의자에 묶여서 여덟 시간을 버티는 고문을 받는 것 같았단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돈이 조금 없어도 가을바람과 낮의 자유, 얼기 직전의 소주가 있잖아. 소주잔에 찬 소주를 졸졸졸 따르는 것처럼 혹자는 그녀에게 마음을 열어 보이라고 하곤 했다. 그..

우산을 쓰고 계곡에 앉아있던 친구의 이마

길이 없이 거친 수풀이 우거져있던 곳도 헤치고 갈 에너지가 있었다. 그때는. 월요일 2교시에서 3교시로 넘어가던 쉬는 시간, 아파트 옆 동에 사는 친구가 내 책상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 지난 주말 멋진 곳을 발견했다는 비밀을 풀어놓았다. 점심시간이 되어 친한 친구 다섯이 모두 모이자 머리통을 맞대고 그곳에 갈 계획을 세웠다. 돗자리랑, 수건이랑, 갈아입을 옷을 챙기자. 토요일 오후 두 시에 산으로 들어가는 길목 앞에서 스포츠 샌들을 신은 다섯 중학생이 만났다. 비가 오래 오지 않은 탓에 잔디가 밟혀 하얗게 드러난 산길은 먼지가 뿌옇게 날렸다. 누가 사는 건지 안 사는 건지 모를 외딴집을 빙빙 돌고 무너져내린 돌담 앞까지 갔지만 졸졸 들릴법한 물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여기 맞는 거야?" 이마에서 땀방울이..

남매의 대화에서 할아버지의 얼굴을

"난 그래도 할아버지 얼굴 봤던게 더 좋아." "나도. 전쟁에서 살아돌아오신게 어디야. 그러니까 할머니한테 잘해드려. 애교도 많이 부리고." "웅." 남동생과 이야기를 하며 주름이 많았던 할아버지 얼굴을 생각한다. 어렸을 때 내가 살던 구미의 한 동네에는 할아버지들이 별로 없었다. 나이든 할아버지들을 볼 수 있는건 주머니속에 꼭꼭 접어 다니던 종이돈 속에서나였다. 우리 할아버지는 세 명의 할아버지들 중 1000원 지폐의 퇴계 이황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5천원짜리의 율곡 이이는 너무 젊은데다 기왓장같은 모자를 쓰고 있었고, 세종대왕은 얼굴이 둥글둥글 살찌고 눈두덩이가 두텁다. 긴 코에 갸름한 얼굴, 불거져나온 광대뼈와 움푹 패인 눈두덩이가 지금 봐도 나의 할아버지와 닮은 듯 하다. 15년 전에 세상을 떠난..

40년 후 나의 하루

밴쿠버는 여름이 가고 'Wake up everyone. How can you sleep at a time like this’ 스피커에서 울리는 알람을 껐다. 7시 30분. 조금 더 자고 싶지만, 수요일엔 요가를 가야 한다. 잠시 멍한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상체를 바로 세우고 베개에 기대앉았더니 웰리가 방 한쪽 구석에서 날 쳐다보고 있다. "굿모닝, 웰리?" 앉아있던 웰리가 반가운 웃음을 지으며 혀를 빼고 뒷다리를 들어 일어선다. 배가 고픈가보구만.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가자, 웰리야. 1층으로 내려가 찬장을 열었다. 사료를 밥그릇에 덜어줬더니 와작와작 맛있게 먹기 시작한다. 식탁 의자에 가만히 앉아 웰리를 내려다보다가 나도 시리얼과 우유를 꺼내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날씨가 좋으니 주방 뒤..

글 쓰는 사람들이 하는 문답

나와 글쓰기 1. 글을 쓰게 된 계기 - 내가 다닌 초등학교가 백일장을 참 자주했다. 그 때마다 상을 꼭꼭 탔고 10살 때 시에서 하는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는데 그 기억이 크다. 자꾸 상을 받으니까 내가 잘하나보다 싶어서 꾸준히 하게 되었다. 2. 하루에 쓰는 분량 - 자주 쓰진 않고 몰아서 기분 내킬 때 쓴다. 날에 따라 A4 4네 장 분량을 쓸 때도 있고 딱 두 장만 쓸 때도 있다. 3. 슬럼프 극복하는 방법 - 글쓰기 하면서 슬럼프 온 적이 별로 없어 따로 방법이 있다고 할 수 없다. 10년 전에 한 번? 그리고 곧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매너리즘 때문에. 4. 작업곡/노동요 - 뭐든 틀어놓고 시작하는데(주로 가사가 잘 안들리는 팝송) 5분정도 지나면 꺼버린다. 노래가 있으면 글이 안써진다...

8월 첫 번째, 가장 강렬했던 여름날

아이스커피 아이스커피의 맛이 가장 생생하게 기억나는 게 언제인지 떠올려 보세요. 더위가 덜 식은 추석 연휴는 아니었나요? 꽉 막힌 고속도로, 다섯 가족이 좁은 세단에 서로를 버티고 앉아 짜증을 부리다가 간신히 휴게소에 들어갔어요. 큰 언니가 추석 보너스를 받았다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쏜대요. "여기서 나가는 길목이 한참 걸릴테니까 얼른 차로 돌아가!"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가볍게 뛰어 차로 가요. 엄마 꺼 한 잔, 내 꺼 한 잔 양손에 들고. 휴게소에서는 아메리카노가 6,000원이나 해요. 그 날 언니는 3만 원으로 차 안의 공기를 환기시켰어요. 혹은 연인과 떠난 바닷가에서 마신 커피의 달콤함이 생각날 수도 있어요. 얼음이 금방 녹아서 약간은 밍밍하지만 청량한 해변과 그 위로..

별의 힘을 믿으시나요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에 북두칠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건 작품을 실제로 본 후 6년이나 지나서다. 북두칠성은 누구나 알고 있고 흔히 예술작품의 대상이 되는 별자리지만, 이 그림에서 국자 모양으로 이어지는 일곱 개의 별을 찾고 나서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이 나에게 와닿은 이유가 더욱 또렷해졌다. 6년전 여름 프랑스 파리를 여행하면서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인 오르세 미술관을 들렀다. 그림에 대해 아는 거라곤 중학교 미술 시간에 훑은 몇몇 유명 작품들의 제목뿐이었지만, 그 몇몇 작품을 포함한 세계적 작가의 그림이 가득한 오르세는 다섯 시간을 둘러보고도 끊임없이 눈이 휘둥그레지는 별세계였다. 폐장이 30분 남았다는 안내 방송을 듣고 마지막으로 달려간 전시실은 빈센트 반 고흐 관이었다. ‘자화상’이나 ‘예..

사랑니가 떠난 시간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버티는 일이 있지 않은가. 낡은 잠옷은 이제 그만 보내줘. 그 녀석은 널 만날 자격이 없으니 제발 헤어져. 마무리 짓는 것이 서로에게, 특히 나에게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관계가 있다. 오래된 잠옷을 버리면 잠옷 입장에서는 더 해어지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고, 나는 빳빳한 새 파자마를 마련해서 기분이 좋을 텐데. 그 사람을 보내주면 그는 자유의 몸이 되니 신나고, 나는 나를 아껴 줄 다른 사람을 만날 기회가 생길 텐데. 나는 어이없게 애착 잠옷도 바람 같은 사랑도 아닌 사랑니를 버리지 못했다. 애초에 삐죽이 모서리를 천장으로 쳐들고 솟아오를 때부터 삐뚤어져 있다는 걸 알아봤다. 야, 사랑니 날 때 원래 이렇게 아프냐? 당연한 질문을 하고 당장 빼러 ..

절친한 친구와 여행 중 다툰 당신, 어색한 분위기 속에 니스의 밤바다를 보며 나란히 앉아 있다.

니스의 야경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정면으로는 하늘과 경계를 찾기 힘든 검은 바다가 부드럽게 육지 쪽으로 파도를 밀어 보냈고, 앉은자리 양쪽으로는 둥근 언덕이 수평선을 향해 천천히 낮아지며 촘촘히 박힌 불빛으로 은은하게 빛났다. 10시가 넘은 시각이었지만 해안은 한낮인 듯 북적였다. 지중해의 여름 바람과 경치에 취한 이들이 큰 소리로 웃으며 발을 굴렀다. 싸구려 와인을 들고 바닷가로 나온 두 사람만이 다른 여행객들의 침묵을 대신하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나는 3유로짜리 와인의 뚜껑을 가볍게 돌려 땄다. 친구는 호스텔 부엌에서 훔쳐 온 플라스틱 와인 잔을 무심하게 내밀었다. 푸쉬식- 탄산 소리와 함께 투명한 액체가 반쯤 잔에 담겼다. “몽마르뜨 언덕에 있던 술집 지하 화장실 냄새가 ..

나는 이런 글을 쓰고 싶다

규방글방 첫번째 모임(4/9) 싱싱한 원근감을 주는 글 어떤 글을 쓰고 싶다, 하고 떠올리면 무수히 많은 작가들 이름 사이에서 떠오르는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름이다. 그의 진면모를 알기 위해 원문을 읽어보려는 시도를 했다거나 원문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여러 번역가가 옮겨 놓은 책들이 동일한 향기를 풍기는 것은 원작자의 색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좋아하는 글을 꼽자면 라는 여행 에세이집의 '푸른 이끼와 온천이 있는 곳'이라는 꼭지이다. 작가는 2008년 9월에 열린 세계 작가 회의를 위해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를 방문했다. 하지만 세계 작가 회의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고, 아이슬란드 곳곳을 돌아보며 자신이 관찰한 것을 40페이지 분량으로 묘사한다. 이 글이 좋은 첫 번째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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